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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사회주의 실험…이념위해 인민을 배곯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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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사회주의 실험…이념위해 인민을 배곯리다

[왁자지껄 경제학] ⑩ 구 소련 계획경제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가난했던 철학자 칼 마르크스와 그를 따랐던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의 붕괴와 사회주의의 승리를 역사의 필연적 흐름’이라고 공언했다. 마르크스의 이 독트린은 20C초 사회주의 경제를 직접 실천하겠다고 나선 소련을 통해 실천됐고 전세계로 확산됐다. 소련은 무려 80년에 걸쳐 ‘계획경제라는 사회주의 생산방식을 실험하면서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했다. 하지만 1991년 소련, 즉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하면서 한때 인류의 절반이 채택한, 혹은 채택하려 했던 이 거대한 실험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1917년 러시아 공산당을 이끌고 볼세비키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즉각 실행에 옮긴다. 레닌은 같은해 출간한 자신의 저작 <국가와 혁명>을 통해 ‘계획경제를 통해 사회 전체가 노동과 임금이 평등한 하나의 사무실, 하나의 공장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실제로 레닌은 공산당 일당(一黨)의 계획과 지휘 아래 소련을 거대한 공장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최대 걸림돌은 당시 소련 사회가 체제 유지와 국부 창출의 대부분을 동력을 농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농업경제였다는 사실이다. 농민들은 이미 오랜 전쟁과 내란 등으로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고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구소련경제5개년계획을알리는선전포스터.이미지 확대보기
▲구소련경제5개년계획을알리는선전포스터.


1918년 소련 공산당은 사기업과 금융사를 접수, 화폐 유통과 사적 상거래를 금지하고 농민이 생산한 물자는 국가에 바치게 했다. 그러나 아직은 레닌의 지지 기반이 확고해지기 전인 이 시기에 안팎의 반대세력과 전쟁을 치르면서 추진된 이 정책이 성공하기에는 물적 기반이 너무도 부족했다. 부농, 빈농을 거릴 것 없이 많은 반발이 있었고 식량 부족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였다. 위기감을 느낀 레닌이 1921년 이른바 '네프‘(NEP, Novaya Ekonomicheskaya Politika)라 불리는 신경제정책을 도입한다. '신경제정책'은 비록 부분적이지만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도입했다. 농민들이 의무적으로 국가에 납부하는 수량을 낮추고 잉여농산물은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해줬다. 규모가 크지 않다면 사기업의 영업활동도 허락했다. 당시 소련공산당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후에 스탈린과 함께 레닌을 몰아냈고 결국 그 스탈린에게 숙청당한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인 니콜라이 부하린은 농민들에게 '부자가 되라'고 독려했다. 부농들로부터 농산물을 징발하기 위해 빈농들의 반부농 정서를 부추겼던 공산당으로서는 매우 큰 정책 변화였다.

▲스탈린.그의철권통치시절처형당한사람의수가최소1천만명에달한다니인류역사를통틀어한사람에게가장큰권력이부여됐고그권력을가장나쁜쪽으로행사한케이스다.
▲스탈린.그의철권통치시절처형당한사람의수가최소1천만명에달한다니인류역사를통틀어한사람에게가장큰권력이부여됐고그권력을가장나쁜쪽으로행사한케이스다.


그러던 중 1924년 레닌이 죽고 레닌이 후계자로 지명한 트로츠키는 정적 스탈린에게 패한다. 스탈린이 공산당 주도권을 장악하자 경제정책의 근간이 바뀐다. 전력, 철강, 석탄 등 소위 중공업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스탈린의 공업촉진정책은 1928년부터 2차 세계대전 때까지 세 차례에 걸쳐 공산당이 지휘하는 이른바 '5개년 계획'을 중심으로 추진됐다. 스탈린 정권의 강력한 통제와 추진력으로 소련의 공업 생산량은 1928년에서 1940년까지 12년 사이 무려 400%까지 성장한다. 1차 5개년 계획에서 공업생산은 2배 이상, 전력생산은 2.7배 성장했고 실업률은 제로였다. 1928년이 소련 계획경제의 시작 시점이라면 그 다음해인 1929년은 ‘대공황’이라는 이름의, 자본주의 경제의 치욕이라는 주가대폭락 사건의 발발 시점이다. 1929년10월24일 일명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로 불리는 주가 대폭락 사건이 발생했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교류하던 국가들이 중심지인 미국을 중심으로 마치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그나마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달러 블록, 파운드 블록, 프랑 블록 등의 식민지 경제통합체를 통해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했지만 독일이나 일본처럼 식민지가 아예 없던 국가들은 치명적 타격이 됐다. 바로 그들 나라에서 경제부흥을 외치면서 강한 국가를 부르짖은 히틀러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또 그들의 손을 잡아준 그 나라 국민들에 의해 2차대전이라는 인류의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세계를 공황으로 몰고간 이 유래없는 글로벌 이벤트에서 유일하게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던 나라가 있으니 바로 구(舊) 소련이다. 소련만이 유일하게 서구 열강을 비웃듯 고성장을 이어갔다. 서구 열강들, 특히 프랑스같은 나라는 아예 대놓고 소련의 계획경제를 찬양하고 벤치마킹하려 나선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공산주의 정당이 세워졌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소련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 수준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타 경제권과의 거래를 거부하는 폐쇄적 계획경제로 인해 전세계 거개의 국가가 그 피해권에 들었던 대공황 때도 살아남았고 나홀로 고성장을 구가하면서 쌓인 국부는 말 그대로 그냥 국가의 부였다. 인민의 생활수준 향상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은채 공산당 집권 기반 강화를 위한 행정 및 군사력 증강에만 투입됐다.

스탈린은 '네프' 같은 자본주의 냄새 나는 사상과 정책을 경멸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성향의 네프같은 정책 대신 사회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데 몰두했다. 사기업의 활동을 금하고 전국에 산재한 농업을 '콜호즈'라는 대규모 집단농장들로 재편, 집단화했다. 그 결과 소수 고위 공산당원을 제외하고는 전국민의 하향평준화가 간단하게 이뤄졌다. 더구나 '5개년 계획' 기간동안 스탈린은 안팎의 반대자를 무자비하게 제거하며 강력한 독재정권을 세웠고 소련 국민의 침묵은 무한정 길어졌다. 특히 앞잡이 니콜라이 예조프를 앞세운 1934년부터 1938년까지의 이른바 '예조프시치나'라는 대숙청 기간에는 스탈린에 반대하는 공산당 지도자, 지식인, 농민들이 무더기로 살해되고 투옥됐다. 1937년 전국의 농지가 사실상 콜호즈化됐고 스탈린이 원하던 농업 집단화가 완료된다. 이 과정에서 반발하는 부농들은 가혹하게 숙청됐고 약 1000만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자신의 뜻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은 차례로 숙청했다.
▲구소련계획경제는인민들이배를곯아야했다면그체제는오래가지못한다는교훈을인류에게선사했다.
▲구소련계획경제는인민들이배를곯아야했다면그체제는오래가지못한다는교훈을인류에게선사했다.


더구나 농업 집단화는 농업의 효율화를 불러오지 못했다. 집단화만 됐을뿐 기계화와 생산성 향상은 도외시됐고 농민의 생산과 소비는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예를 들면 기계를 이용하는 집약적 농업 생산방식이 아니었던 탓에 집단화 이전이나 이후나 트랙터 및 농기계를 다룰 줄 아는 농민의 수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했다. 농업 집단화를 통해 정부가 직접 식량 공급을 관리하지만 국민이 필요로 하는 기본 곡물 수요조차 충족하지 못했다. 국민들이 기아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스탈린은 집단농장에서 산출된 곡물을 해외로 수출해 그 돈을 공업화의 재원으로 썼다. 결국 소련의 공업화는 소련 농민의 거대한 희생 위에서 이뤄진 것이다. 1917년 소비에트 혁명 이전에는 세계 최대 농업수출국이었던 러시아는 소비에트연방이 된 이후, 심지어 2차대전 이후까지 농산물을 해외에서 들여와야 했다.

1953년 후르시초프가 집권한 뒤부터는 새로운 문제가 소련을 괴롭혔다. 스탈린의 공업촉진정책으로 중공업이 기반을 잡기는 했으나 적시에 추가 투자를 못해 설비가 낡아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인적 자본의 황폐화였다. 계획경제와 공산당 일당 독재는 국민의 노동의욕을 저하시키고 사회 전체에 무관심을 증폭시켰다.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성과를 내려는 도전정신과 새로운 것을 발상하려는 창의력은 사라지고 책임은 회피하고 자기 의지로는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으려는 수동형 인간들만 넘쳐났다. 개인과 조직 전반에 걸쳐 효율이 저하되고 비용을 줄이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자원 낭비가 심해졌고 기술 진보는 언감생심이었다. 나라 경제는 만성적 물자 부족에 허덕인다.

80년대 들어 소련 경제는 극도로 침체된다. 국영기업의 50% 이상이 만성 적자에 시달려 거액의 정부재정 지원을 필요로 했다. 1986~1988년에는 국영 집단농장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거액의 재정이 필요했다. 국민 생활은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런 가운데서도 소수의 당 간부와 정부 관리들은 특권을 누리며 사치스럽게 살면서 부패한 방법으로 축재했다. 당시 국민총생산(GNP)의 20%나 되는 비용을 국방비로 썼다. 미국은 소련 계획경제의 실패가 명확해진 시기를 1970년대로 판단한다. 이때부터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때까지 소련은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 악화일로의 경제, 늘어나는 사회문제로 서서히 무너져갔다는 것이다. 중공업과 국방을 우선시한 투자가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경제 시스템이 복잡하고 경직되어 소비 부문의 발달 정도가 서유럽은 물론 동유럽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다. 모든 제도가 원시적이며 불균형 상태에 놓여 있었다.

▲2차대전의승전국이었던소련은계획경제의실험을계속하다'효율저하'라는적을만나전후글로벌경제에서는패전국이됐다.
▲2차대전의승전국이었던소련은계획경제의실험을계속하다'효율저하'라는적을만나전후글로벌경제에서는패전국이됐다.


1985년에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경제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안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밖으로는 글라스노스트(개방)라는 실용정책을 펼쳤다. 국내 경제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를 완화하고 기업의 자유로운 영업 범위를 확대하고 시장경제제도를 더욱 많이 도입했다. 일련의 정치개혁도 추진했다. 그러나 부활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1991년 12월 소련(소연방)을 구성했던 러시아 등 11개 나라들이 독립국가연합을 선언함으로써 소련은 해체되고 만다.

소련 경제의 붕괴로부터 세계는 깨달음을 얻는다. 재산의 사적 소유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생산과 분배를 국가가 계획하고 통제하면서 그 욕망을 억누르려 한다면 생산성은 분명히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과정을 이념의 실천을 위해 인간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는 한 명의 독재자가 주도했다면 그 결과는 파멸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산업/IT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