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그림책을 다 외운 아이가 매일 밤 다시 펼치는 이유는, 결말이 아니라 목소리 때문이다. 오늘 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부모가 아니라면, 아이의 세계에서는 무엇이 조용히 사라지는가.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한 실험이 있다. 중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다섯 살에서 여덟 살 아이들이 태블릿으로영어 그림책을 읽는다. 화면 속에는 챗지피티(GPT-4) 기반의 노란 캐릭터 '미아(Mia)'가 등장해 중국어와영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들려주고, 중간중간 묻는다. "작은 오크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왜 실망했을까?" 다른 아이는 같은 책을, 같은 질문을, 부모의 목소리로 영어로 듣는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버팔로대학교(University at Buffalo), 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of California) 소속 연구자들이 참여한 연구팀이 2025년 7월 발표한 논문에서, 67명의 아이를 무작위로두 집단에 배정해 비교한 실험이다.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아이에게 부모가 매번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를 이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실험은 바로 그 지점, 부모의 언어 부담이 큰 상황에서 AI가 대안이될 수 있는지를 정면으로 묻는다.
숫자만 놓고 보면 저울은 AI 쪽으로 기운다. 이야기를 이해하는 정도를 측정하는 시험에서 AI와 함께 읽은 아이들의 점수가 부모와 읽은 아이들보다 뚜렷하게 높았다. 화면과 이야기에 시선을 붙들어 두는 힘도AI 쪽이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더 강했다. 산만하게 만드는 요소 없이 정해진 순간마다 정확한 질문을 던지는 AI 앞에서, 아이의 시선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았다.
정보를 습득하는 능력과 관계를 맺는 감각은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그런데 이 결과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 하나가 남는다. 정서적 유대에서는 사람이 앞선다면, 무언가를 판단하고 누군가를 믿어야하는 순간에도 아이는 사람 쪽으로 기울지 않을까. 이 물음을 정면으로 시험한 또 다른 연구가 있다.
스웨덴 KTH 왕립공과대학교(KTH Royal Institute of Technology), 독일 컨스트럭터대학교(ConstructorUniversity), 호주 그리피스대학교(Griffith University) 소속 연구자들이 참여한 연구팀이 2024년 4월 실험 결과를 공개했다. 3세에서 6세 아이 111명에게, 사람과 AI가 각각 낯익은 물건과 낯선 물건의 이름을말해주는 영상을 보여줬다. 사람과 AI 둘 다, 아이가 이미 알고 있는 물건의 이름은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문제는 낯선 물건이었다. 처음 보는 물건의 이름을 아이는 둘 중 누구의 말을 믿고 따라갈 것인가.
결과는 예상을 벗어났다. 사람과 AI 둘 다 그동안 정확하게 답해온, 즉 믿을 만하다고 이미 확인된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AI가 말한 이름 쪽으로 기울었다. 사람이 더 친숙하고 표정도 풍부한데도 그랬다. 연구팀은흥미로운 지점을 하나 더 짚었다. 사람이 실수를 저지르면 아이들은 그 실수를 일부러 그런 것일 수 있다고 의심했다. 반면 AI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아이들은 그것을 그냥 오류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AI에게는 애초에 나쁜 의도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력에서도, 낯선 정보를 판단하는 신뢰에서도, 실수를 봐주는 관용에서도 AI는 사람에게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세 경우 모두 사람보다 유리한 자리를 차지한다. 두 연구를 겹쳐 놓으면 이 그림이 뚜렷해진다. 사람은 흔들리고 지치고 때로 틀리는 존재로 아이 눈에 비치는 동안, AI는 한결같고 정확하고 무해한존재로 조용히 자리를 넓혀간다. 부모가 그림책을 읽어주다 단어를 잘못 말하면 아이는 순간 고개를 갸웃하지만, 같은 실수를 AI가 저지르면 아이는 의심 없이 넘어간다. 아이의 마음속에서 권위는 이미 자리를옮기는 중이다.
그러니 부모가 해야 할 일은 AI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다다르지 못하는 자리를 분명히 지키는 것이다. 아이가 화면 속 캐릭터에게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동안, 부모는 반드시 그 옆에 남아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너라면 작은 오크처럼 실망했을까?"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는 질문 앞에서만 아이는 비로소 AI가 아니라 사람을 마주 본다. 이 순간을 지키지 않으면 아는 이해력은 얻고 관계는 잃으며, 정확함은 얻고 분별력은 잃는다.
그림책의 첫 장을 넘기는 손이 누구의 것인지는, 아이의 남은 평생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문제다. 그 손이쥔 것이 태블릿이든 종이책이든, 아이 곁에서 함께 웃고 함께 의심하고 함께 안아주는 존재가 없다면 그책 읽기는 처음부터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지식을 넣어주는 일은 이제 기계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밤 이 이야기를 나와 함께 읽어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 기억 하나만은 사람만이 아이의 마음에 새길 수있다. 그리고 그 기억이야말로,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끝내 흉내 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최홍규 미디어학 박사 / EBS 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