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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이탈리아 ROBOTOR, 로봇 기술로 예술의 미래를 조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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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이탈리아 ROBOTOR, 로봇 기술로 예술의 미래를 조각하다

6년 걸릴 대가 작품 10일 만에 완성…인간은 '마지막 1%' 영혼 불어넣어
"로봇은 창작 도구일 뿐"…기술과 인간의 협업, 새로운 예술 모델 제시
오픈AI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오픈AI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위해 직접 돌을 골랐던 땅, 이탈리아 카라라. 고대 로마 시대부터 최고급 대리석 '비안코 카라라'의 산지로 명성을 떨친 이곳에서 예술의 미래를 향한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 예술가의 망치와 정 소리 대신, 로봇 팔이 24시간 쉬지 않고 대리석을 깎아내며 거장의 숨결을 재현하고 있다. 과연 기술은 예술가의 영혼을 대체할 수 있을까. 최첨단 '현대 미술 공장'의 심장부에서 예술과 로봇의 관계를 목도했다.

◇ "이제 미켈란젤로는 필요 없다"… 기술, 예술을 재단하다

"이제 미켈란젤로는 필요 없다"(뉴욕타임스), "로봇이 조각의 미래를 연다"(CBS '60분').

서구 언론이 주목하는 기업 'ROBOTOR'는 카라라의 한 채석장 부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전 세계 예술가들의 의뢰를 받아 3D 데이터에 기반해 로봇으로 대리석 조각을 제작하는 곳이다. 창업자 중 한 명인 LITIX의 자코모 마사리 최고경영자(CEO)는 "작품의 99%까지 로봇으로 완성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예술가에게 받은 설계도를 3D 데이터로 변환해 자체 프로그램(OR-OS)에 입력하면, 로봇이 물 분사와 자동 도구 교환 기능 등을 활용해 쉴 새 없이 돌을 깎는다.
그 효율은 압도적이다. 인간에게는 고행과도 같은 대리석 조각 공정을 로봇은 기존의 10분의 1 시간 만에 해낸다. 마사리 최고경영자는 "신고전주의 거장 안토니오 카노바가 6년 걸려 완성한 '아모르와 프시케'를 우리는 단 열흘 만에 만들 수 있다"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ROBOTOR의 시작은 조각가인 필리포 틴콜리니가 2004년 설립한 회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6년 처음 조각에 로봇을 도입한 그의 시도는 세계적인 건축가 고(故) 자하 하디드의 눈에 띄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하디드가 설계한 유선형 테이블 '아쿠아' 제작에 참여하며 명성을 얻었고, 이후 세계적인 예술가들과의 협업이 줄을 이었다.

이들의 기술력은 예술계를 넘어 학술, 외교 영역에서도 빛을 발했다. 2015년 IS가 파괴한 시리아 팔미라 유적의 '팔미라의 문'을 디지털 고고학 연구소와 협력해 복원했으며, 2022년에는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파르테논 신전의 '셀레네의 말' 두상을 실물 크기로 복제해 영국과 그리스 사이의 문화재 갈등을 완화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 기술의 정점, 그러나 남겨진 '마지막 1%'의 물음

틴콜리니의 작업실에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주세페 페노네 등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이 즐비했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생존 작가인 제프 쿤스의 '실패작'이 한편에 무심히 놓여 있을 정도다. 작가의 마음에 들지 않아 창고로 향했다는 미완의 작품은, 역설적으로 로봇 기술의 정점에서도 최종 결정권은 여전히 예술가의 몫임을 시사한다.

아무리 정교한 로봇이라도 작품의 100%를 완성하지는 못한다. 마지막 1%의 영역은 여전히 인간 장인의 몫이다. 젊은 장인들이 로봇이 깎아낸 조각의 세부를 다듬고 표면을 연마하며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로봇이 만든 예술품이 천문학적인 금액에 거래되는 현실은 편리함 이면에 '창작의 본질'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

◇ 로봇이냐, 인간이냐…뜨거운 예술혼 논쟁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예술계에 '인간 대 로봇'이라는 오랜 논쟁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일부 전통 조각가들은 "로봇이 손끝의 온기와 예술혼을 대체할 수 없다"며 수작업의 가치를 역설한다. 반면 기술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로봇은 고된 물리적 노동을 줄여 예술가가 창의력과 작품 해석에 더욱 집중하도록 돕는다"고 반박하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에 틴콜리니는 "실제로 우리 기술을 쓰는 예술가에게 직접 들어보라"고 권했다.

◇ 예술가의 고백 "로봇은 도구일 뿐, 영혼은 인간의 몫"

카라라 인근 피에트라산타에서 만난 조각가 파비오 비알레는 로봇 기술의 명확한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이야기했다. 과거 명작에 문신을 새기는 파격적인 작업으로 베네치아 비엔날레에도 참여했던 그는 2010년부터 로봇을 활용해왔다.

"대리석 작업은 혼자서 절대 불가능합니다. 거장 카노바의 공방에도 250명의 직원이 있었습니다. 현대에 그만한 인력을 고용하기는 어렵죠. 로봇을 현명하게 사용하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술의 역할과 한계를 명확히 했다. "눈과 입을 만들어 표정을 부여하고 조각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은 오직 예술가만 할 수 있습니다. 피부나 머리카락, 옷의 질감을 표현하는 것 역시 인간의 영역이죠."

◇ "과거 거장들처럼 새 기술 활용할 뿐"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배리 X 볼 역시 "과거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당시의 최신 기술을 활용했듯, 우리도 같은 일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1990년대부터 3D 스캔과 CAD 기술을 작품에 도입한 선구자다. 최근에는 15세기 일본 불상을 여러 종류의 석재를 조합해 복제한 '붓다'를 제작했다. 로봇이 전체의 형태를 깎아내지만, 각기 다른 돌을 조합하고 세부를 조각하는 데는 수많은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는 "기술이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두려워하지만, 제 작업실에서는 로봇 한 대 덕분에 더 많은 작품을 만들고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며 기술과 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했다.

◇ 사진이 회화를 대체하지 않았듯, AI는 예술의 지평을 넓힐 것

사실 예술에 기계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미국의 미술가 해럴드 코언은 1960년대부터 자신의 분신인 컴퓨터 화가 '아론(AARON)' 개발에 평생을 바쳤다. 다마 미술대학의 구보타 아키히로 교수에 따르면, 코언은 화가로서 자신이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을 아론에게 가르치려 했다는 점에서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는 현대 AI와는 결이 다르다. 흥미로운 대목은 코언이 아론의 자율성이 커질수록 오히려 '대화'와 '협업'을 중시했다는 점으로,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깊은 시사점을 던진다.

현대 미술은 결과물의 기술적 완성도보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려 했는가'라는 과정과 개념을 중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로봇과 AI는 창작 과정을 단축시키거나 사유를 심화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구보타 교수는 "과거 사진 기술이 등장했을 때도 '회화는 죽었다'고들 했지만, 둘은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예술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AI의 미래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리서치 기반 아트' 등에서 AI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카라라의 로봇들은 예술가의 손과 시간을 대체하고 있지만, 그 영혼까지 대체하지는 못했다. 미켈란젤로 시대 장인 정신을 잇고 넓히며, 기술은 전통적인 예술성과 경합하며 '사람과 로봇의 협업'이라는 새로운 예술 모델을 만들어내고 있다. 과거 예술가들이 그랬듯, 동시대의 예술가들 역시 새로운 기술을 유용한 도구로 삼아 자신의 창작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로봇은 예술가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기술을 창의성 확장의 도구로 삼아 '예술가의 정의'와 예술의 지평 자체를 넓혀가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