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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ML 'AI칩 핵심장비' 대당 5600억 원...TSMC는 외면, SK하이닉스·삼성 전격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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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ML 'AI칩 핵심장비' 대당 5600억 원...TSMC는 외면, SK하이닉스·삼성 전격 도입

반도체 리소그래피 독점기업, 최대 고객 도입 거부에 성장 급제동...한국 메모리 업체가 활로
ASML의 고수차 극자외선(EUV) 클린룸 내부 모습. 이 업체는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복잡한 리소그래피 장비를 제조한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ASML의 고수차 극자외선(EUV) 클린룸 내부 모습. 이 업체는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복잡한 리소그래피 장비를 제조한다. 사진=로이터
인공지능(AI) 칩 제조 핵심 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네덜란드 ASML이 신형 장비에 대한 주요 고객사의 소극적인 태도로 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배런스는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ASML의 미국예탁증권(ADR)이 지난 1년간 11% 상승에 그쳐 다른 AI 공급망 기업들에 비해 부진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TSMC, 대당 5600억 원 신형 장비 도입 거부


ASML이 부닥친 가장 큰 난제는 최대 고객사인 대만 TSMC의 미온적 반응이다. ASML은 차세대 '고개구수 극자외선(High NA EUV)' 리소그래피 장비를 독점 공급하고 있으며, 이 장비는 앞으로 10년간 더욱 미세한 칩 제조를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대당 4억 달러(약 5600억 원) 이상인 가격이 걸림돌이다.

개구수는 리소그래피 장비가 빛을 모아 칩 위에 얼마나 정밀한 회로를 그릴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수치다. 개구수가 높을수록 한 번에 더 복잡한 회로 패턴을 새길 수 있다. 마치 고성능 카메라 렌즈가 더 선명한 사진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 고개구수 장비는 단 한 번 빛을 쏘는 것만으로 복잡한 회로를 만들 수 있지만, 기존 저개구수 장비는 여러 번 반복 작업을 해야 한다. 반복 작업은 시간이 더 걸리고 불량이 생길 가능성도 높다.

TSMC 관계자는 지난 5월 업계 콘퍼런스에서 현재 보유한 EUV 장비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TSMC는 배런스에 보낸 성명에서 "고개구수 EUV는 성숙하고 고객에게 최대 이익을 제공할 준비가 됐을 때 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바클레이스의 사이먼 콜스 분석가는 ASML이 올해 5대를 출하한 데 이어 내년에는 3대만 출하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2028년 이전에는 광범위한 도입이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보며 해당 주식에 대해 보유(Hold) 의견을 제시했다.

인텔 도전과 불확실한 미래


ASML에 희망은 인텔이다.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은 과거 ASML의 EUV 장비 전환이 늦어 TSMC에 첨단 칩 시장을 빼앗긴 바 있다. 팻 겔싱어 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TSMC와 경쟁하기 위한 전략으로 'High NA EUV' 리소그래피 2대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퓨처럼 그룹(Futurum Group)의 레이 왕 분석가는 "고개구수 도입만이 인텔의 유일한 결정 요인이 아니다"라면서 "성공은 EUV 사용 숙련도, 수율 학습 곡선, 생태계 준비, 전체 생산능력, 비용 경쟁력, 내부 제품을 넘어선 광범위한 고객 기반 확보 능력 등 여러 요인에 달렸다"고 말했다.

엔비디아와 브로드컴이 테스트 중인 것으로 알려진 인텔의 18A 공정이 기술 우위를 되찾을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인텔은 주요 외부 고객 확보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 인텔은 18A가 최소한 초기에는 주로 내부 제품에 쓰일 것이라고 밝혔으며, 다음 세대 14A 공정은 중요한 고객을 확보하지 못하면 중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근 엔비디아가 인텔에 50억 달러(약 7조 원)를 투자한다는 소식에 시장은 인텔 칩 제조 미래를 기대하며 들썩였다. ASML 주가는 이 소식에 6% 이상 뛰었다. 그러나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는 앞으로 인텔 생산시설을 쓸 것이냐는 질문에 반복해 답변을 피하면서 TSMC의 역량을 치켜세웠다.

독립 기술 분석가 니컬러스 바라트는 "TSMC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 칩을 만들고 있다"면서 "그런 TSMC가 고개구수 EUV 장비 없이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인텔이 TSMC보다 덜 복잡한 칩을 만들면서 더 비싸고 복잡한 장비를 꼭 써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SK하이닉스·삼성, HBM 경쟁 위해 선제 투자


ASML의 새로운 돌파구는 메모리 칩 분야에서 열리고 있다. 메모리 칩 산업은 저비용 제조에 집중하고 메모리 칩 레이어를 쌓아 밀도와 성능을 높일 수 있어 최신 리소그래피 기술 도입이 로직 칩 산업보다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변화 조짐이 보인다. 엔비디아 등 최신 AI 프로세서에 필수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칩 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현재 HBM 시장을 선도하는 SK하이닉스는 이달 초 극한 미세화와 고밀도 요구사항에 대비하려고 업계 최초로 양산용 'High NA EUV'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 대변인은 배런스에 보낸 성명에서 올해 2월 고개구수 EUV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메모리 칩 사업과 외부 고객을 위한 칩 제조 모두에 쓰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관련 계획 논평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증권가에서는 SK하이닉스와 삼성의 움직임이 메모리 칩 경쟁사들에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ASML 대변인은 배런스에 보낸 성명에서 "고개구수 EUV는 비용 효율적인 방식으로 단일 패터닝 이점을 실현할 수 있다"면서 "공정 복잡성 감소, 사이클 타임 단축, 잠재 수율 향상 등 이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ASML은 모든 EUV 고객사가 이 기술 도입을 약속했다고 밝혔지만, 고개구수 EUV 장비 출하량 전망에 대해서는 논평을 거부했다. 배런스는 "최고 기술을 보유하는 것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으며, 특히 공급업체가 지배적인 고객에게 좌우될 때 더욱 그렇다"면서 "결국 고개구수 EUV 장비는 필수품이 될 것이지만 투자자들은 업계가 미래 기술에 값을 치를 준비가 될 때까지 답답한 기다림을 견뎌야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