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증시 20년 만에 최고치, 국채금리는 7년 만에 최저
약달러·美 경제불안이 부른 이례적 동반 강세…"비서방 자산 신뢰 이동"
약달러·美 경제불안이 부른 이례적 동반 강세…"비서방 자산 신뢰 이동"

끝 모를 금값 고공행진이 신흥시장 전반에 예상치 못한 '황금 횡재'를 안기고 있다. 2025년 들어 국제 금값이 온스당 4200달러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새로 쓴 가운데, 금을 채굴하거나 대량 보유한 국가들을 중심으로 투자자 신뢰가 회복되면서 증시와 통화 가치가 함께 오르는 선순환이 나타나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20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미 달러화 가치가 1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약달러 현상과 미국 경기 둔화 우려, 여기에 각국 중앙은행의 금 보유 확대 흐름이 맞물린 결과다. 과거 안전자산인 금과 위험자산인 신흥시장이 반대로 움직였던 공식을 깨고 이례적인 동반 강세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금값 랠리 최대 수혜국, 남아공·가나
세계에서 가장 깊은 금광을 지닌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대표적 사례다. 남아공 증시는 20년 만에 최고의 한 해를 눈앞에 두고 있다. 현지 증시의 FTSE/JSE 아프리카 올 셰어스 지수는 2025년 들어 30% 넘게 올랐으며, 시바녜 스틸워터, 앵글로골드 아샨티, 골드 필즈 같은 주요 광산 기업들의 주가는 세 배까지 치솟았다. 통화인 랜드화 가치는 1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에 다가섰고,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2018년 이후 처음으로 9% 선 아래로 떨어지는 등 금융시장 전반이 활기를 띠고 있다.
오랜 기간 정치 혼란과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았던 전력난 탓에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었던 나라의 극적인 반전으로 평가된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광업 경쟁력이 살아나면서 남아공 채권과 주식 모두 추가로 오를 힘이 있다"고 평가했다.
중앙아시아의 주요 금 생산국인 우즈베키스탄도 주목할 만하다. 나라의 외환보유액 가운데 금 비중이 아주 높은 이 나라는 금값 상승 덕분에 재정 여력과 경상수지가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윌리엄 블레어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의 대니얼 우드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금값 강세는 우즈베키스탄, 가나, 남아공 같은 몇몇 신흥국 그룹에 뚜렷한 호재"라며 "더 넓게 보면, 투자자들이 미국 달러 같은 전통적인 선진국 통화에서 벗어나 다른 투자처를 활발히 찾는다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그는 "금을 많이 가진 나라로서 우즈베키스탄 통화(수뇰리) 전망이 밝다"고 덧붙였다.
'안전자산' 금이 '위험자산' 신흥국 살리는 역설
물론 신중론도 나오고 있다. 세계금협회(WGC) 자료를 보면 폴란드, 튀르키예, 카자흐스탄 등도 올해 2분기 금 보유량을 크게 늘렸지만, 애시모어 그룹의 알렉시 드 모네스 채권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외환보유고에서 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나라들의 재정 건전성이 좋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금 가격 변동 효과 자체를 나라 신용도의 근본적인 개선 요인으로 풀이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거 금값 상승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보여주며 위험자산 회피 심리를 키우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달러 약세와 미국 경제 정책에 대한 불안감이 겹치면서 통상적인 투자 공식이 깨지고 있다. 금값 상승(실물자산 가치 증대), 달러 약세(신흥국 통화 강세 유도), 물가 상승세 완화(금리 인하 여력 확보)가 어우러져 신흥국 자산에 '3중 훈풍'을 만들어내는 이례적인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번 강세가 단순히 안전자산을 찾는 흐름을 넘어, 서방이 아닌 다른 자산에 대한 구조적인 믿음의 이동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보스턴에 있는 스테이트 스트리트 마켓의 닝 선 선임 신흥시장 전략가는 "이번 강세는 선진시장에 비해 신흥시장에 혜택이 더 크다"며, 그 까닭으로 "신흥시장은 금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많이 사두는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금 생산과 보유라는 양 날개를 단 신흥국들이 전례 없는 금값 강세의 최대 승자로 떠오르고 있다. 다만, 앞으로 미국 금리가 다시 오르거나 달러화 가치가 회복되면 시장이 조정을 받을 수 있고, 금 상장지수펀드(ETF)에 자금이 몰리면서 거품 걱정이 커지는 등 잠재적인 위험은 남아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