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심장’ TSMC 앞세워 ‘AI 기본법’ 제정… 처벌보다 ‘혁신·윤리 균형’에 방점
노동자 보호·위험 기반 관리 명문화… 한국형 AI 거버넌스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노동자 보호·위험 기반 관리 명문화… 한국형 AI 거버넌스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이미지 확대보기대만 행정원은 지난 28일 AI 산업 진흥과 규제를 동시에 포괄하는 ‘AI 기본법’을 제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유럽연합(EU)의 강력한 법적 규제(Hard Law)와 미국의 자율 중심 모델(Soft Law)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은 ‘대만식 해법’으로 평가받는다.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을 장악한 ‘제조 권력’이 직접 설계한 이번 거버넌스가 국제표준 경쟁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반도체 심장’이 설계한 AI 질서… 단순 기술 넘어선 ‘사회적 합의’
대만의 이번 입법이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는 까닭은 대만이 가진 독보적인 위상 때문이다. 대만은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인 TSMC를 보유하고 있다. TSMC는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약 72%를 차지하며, 매출의 59%를 AI 및 고성능 컴퓨팅(HPC) 칩에서 거두고 있다. AI의 ‘두뇌’를 사실상 독점 생산하는 국가가 직접 AI 활용 규칙을 설계했다는 점에서 그 파급력은 작지 않다.
전문가들은 이번 법안이 산업 보호와 국제 사회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하려는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대만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를 주무 부처로 지정하고, AI 거버넌스의 큰 틀을 마련한 것은 AI 인프라 허브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특히 이번 법안은 기술 발전이 가져올 노동 시장의 충격을 완충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법안에는 AI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을 위험이 있는 노동자에게 ▲재취업 지도 ▲기술 격차 해소 교육 ▲노동 시장 참여 지원 등을 제공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는 AI를 단순한 산업 육성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직결된 사회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제와 자율 사이… ‘원칙 중심’ 제3의 모델
대만 AI 기본법의 핵심은 ‘유연성’이다. 위반 시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EU의 ‘AI법(AI Act)’과 달리, 대만은 처벌 조항을 즉시 도입하지 않고 7대 기본 원칙을 먼저 제시했다. 급변하는 기술 속도를 법이 따라가지 못해 혁신을 저해하는 부작용을 막겠다는 의도다.
법안이 제시한 7대 원칙은 ▲지속 가능성과 웰빙 ▲인간 자율성 ▲개인정보 보호 및 데이터 거버넌스 ▲사이버 보안과 안전 ▲투명성과 설명 가능성 ▲공정성과 차별 금지 ▲책임성 등이다.
‘위험 기반 관리’로 구체화… 한국에도 참고서 될 듯
대만 정부는 이번 기본법을 토대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다듬을 계획이다. 핵심은 디지털발전부(MODA)가 준비 중인 ‘위험 기반 관리(Risk-based Management)’ 프레임워크다. 이는 AI 시스템이 사회에 미치는 위험도에 따라 규제 강도를 달리하는 방식이다. 의료나 핵심 인프라에 쓰이는 고위험 AI는 엄격한 심사를 거치게 하고, 엔터테인먼트 등 저위험 분야는 규제를 풀어주는 식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한국을 비롯한 후발 AI 국가들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혁신을 가로막지 않으면서도 윤리 기준을 세우려는 대만의 시도는 규제 일변도나 방임주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 통상 전문가들은 “대만의 전략은 글로벌 기준을 따르면서도 자국 기업이 뛸 수 있는 운동장을 최대한 넓게 확보하려는 실리적인 접근”이라며 “앞으로 구체화될 위험 등급 분류 기준이 대만 반도체 생태계와 어떻게 맞물릴지 지켜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쥔 대만이 쏘아 올린 ‘AI 기본법’이 기술 패권 경쟁 시대에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