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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박 외교'의 민낯…트럼프가 이란 발전소 공격을 접은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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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박 외교'의 민낯…트럼프가 이란 발전소 공격을 접은 진짜 이유

동맹 경고·유가 충격·협상 연막, 세 가지 동기가 뒤엉킨 '5일 유예'의 실체
브렌트유 장중 10% 폭락 뒤 반등…이란 부인에 시장은 "해결 아닌 연기"로 읽어
미국 시장이 열리기 직전, 트럼프는 방아쇠를 내려놨다. 협박인가, 협상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과 걸프 협력국들은 사전 비공개 경로를 통해 트럼프 측에 이란 전력 기반 시설 파괴의 위험성을 집중 경고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과 걸프 협력국들은 사전 비공개 경로를 통해 트럼프 측에 이란 전력 기반 시설 파괴의 위험성을 집중 경고했다. 사진=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각) 이란의 발전소와 에너지 기반 시설에 대한 군사 공격을 5일간 미루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블룸버그통신·악시오스·CNN 등 복수의 미국 언론이 23일(현지시각) 보도한 내용을 종합하면, 이번 결정의 배경에는 서방 동맹국들의 강력한 반대와 원유 시장에 대한 트럼프의 계산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겉으로는 협상 타결 기대감이었지만, 이란이 즉각 "어떤 대화도 없었다"고 정면 반박하면서 국제 원유 시장은 급락 이후 혼조세를 이어갔다.

"발전소 파괴는 실패 국가 제조"…동맹국 경고가 트럼프 멈춰 세웠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복수의 익명 관계자를 인용해 트럼프의 결정이 단순한 '협상 진전' 발표 이상의 맥락에서 나왔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과 걸프 협력국들은 사전 비공개 경로를 통해 트럼프 측에 이란 전력 기반 시설 파괴의 위험성을 집중 경고했다.

이들이 전달한 핵심 논지는 하나였다. 이란의 주요 전력망을 영구적으로 무력화하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란이 '실패 국가(failed state)'로 전락할 가능성이 거의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전직 미 국방부 중동 담당 부차관보 데이나 스트라울은 "민간 에너지 인프라를 겨냥하는 것은 전쟁범죄에 해당할 소지가 있는 새로운 에스컬레이션의 선을 넘는 일"이라며 "5일 유예와 협상 개시 발표가 미국 시장 개장 직전에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자신도 유가 관리 의도를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테네시주로 이동하는 전용기에 오르기 전 기자들에게 "거래가 성사되면 유가는 곧바로 폭락할 것이다. 오늘 벌써 그렇게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브렌트유 5월 인도분은 이날 아시아장에서 배럴당 114달러를 웃돌았다가 트럼프의 발표 직후 91달러대까지 수직 낙하하며 장중 최대 10% 이상 급락했다.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역시 8~9%대 하락폭을 기록하며 배럴당 80달러 후반대까지 밀렸다. 전쟁 리스크 프리미엄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셈이었다.

쿠슈너·위트코프 투입됐지만…이란 "협상 없다" 전면 부인


트럼프는 자신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중동 특사 스티브 위트코프가 지난 22~23일 이란 측 인사와 직접 협상을 벌였다고 밝혔다.

그는 협상 상대방의 이름을 거론하면 "그 사람이 죽을 수 있다"며 공개를 거부했지만, 악시오스는 이스라엘 관계자를 인용해 쿠슈너와 위트코프가 이란 의회 의장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와 접촉했다고 보도했다.

CNN에 따르면 미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이란 측에 15개 항목의 요구 사항 목록을 전달했는데, 한 관계자는 여러 항목이 이란이 수용하기 "거의 불가능한" 조건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이란의 반응은 냉혹했다. 이란 외무부는 "어떠한 미-이란 협상도 없었다"고 단호히 부인했고, 갈리바프 의장도 "트럼프의 주장은 금융·원유 시장을 조작하기 위한 가짜 뉴스"라고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란 혁명수비대 연계 반관영 파르스통신은 오히려 "이란이 서아시아 전체 발전소를 타격하겠다고 경고하자 미국이 물러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란의 부인 발표가 나오자 한때 급락하던 유가는 낙폭을 일부 만회했다. 시장 안팎에서는 이번 하락을 '종전 신호'가 아닌 '유예된 긴장'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에너지 정책 분석업체 클리어뷰에너지파트너스는 투자자 메모를 통해 "트럼프는 방향 전환을 즐기는 성향이 있으며, 이번 48시간 시한이 향후 어떤 군사적 사건을 위한 연막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5일의 시계'가 흘러가는 동안…한국 원유 수급도 '칼날 위의 평형’


이번 5일 유예가 의미하는 바는 미국·중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란 전쟁 발발 이후 배럴당 66달러에서 113달러대까지 치솟은 국제유가는 한국 경제 전반에 직접적인 충격을 가하고 있다. 국내 원유 수입의 약 69%가 중동산이며, 이 가운데 95%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구조 IMBC이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현재 약 1억 배럴(117일분)의 정부 비축유에 민간 재고를 더해 총 200일 이상 버틸 수 있는 공급 능력을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숫자만으로는 구조적 취약성을 가릴 수 없다고 지적한다. 미국 스팀슨 센터 한국 프로그램 제임스 김 국장은 "단기적 분쟁은 비축분으로 버틸 수 있지만, 봉쇄가 수개월 이상 지속 되면 한국의 제조·수출 역량에 심각한 훼손이 발생할 것"이라며 공급망 다변화 가속화를 강조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에너지 수급 불안에서 생산 비용 상승을 거쳐 공급망 충격으로 이어지는 구조적 위험에 한국 경제가 노출된다는 분석도 나왔다.

미국 전직 국가정보국 중동 담당 부국장 조너선 패니코프는 "미국이 이란의 에너지 위협에 한발 물러선 것으로 비칠 경우, 이란은 자국의 억지력이 높아졌다고 판단할 것"이라며 향후 협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스라엘은 트럼프의 5일 유예 발표를 사전 통보받았으나 전투를 멈추지 않았다. 발표 1시간도 되지 않아 이란 수도 테헤란 심장부를 타격했고, 군 대변인은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고 못 박았다.

5일의 유예 시계는 지금 이 순간도 흘러가고 있다. 기한이 끝난 뒤 트럼프가 다시 발전소 카드를 꺼낼지, 아니면 협상 테이블이 실제로 차려질지에 따라 배럴당 80달러대로 내려앉은 유가가 다시 110달러를 향해 달릴지가 결정된다.

한국이 보유한 200일분의 비축유가 과연 그 방파제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는 테헤란과 워싱턴의 셈법에 달려 있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