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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의 산업시각] 현대그룹 최초 글로벌 No.1 작품 ‘컨테이너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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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의 산업시각] 현대그룹 최초 글로벌 No.1 작품 ‘컨테이너 박스’

정몽구 회장, 1976년 신사업으로 컨테이너 낙점
현대정공 설립해 본격 추진, 7년 만에 세계 1위
현재 컨테이너 중국 의존도 높아, 공장 남겼어야
HMM의 세계 최대 2만4000TEU급 컨테이너운반선 ‘HMM 알헤시라스’호가 컨테이너를 만재하고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고 있다. 사진=HMM이미지 확대보기
HMM의 세계 최대 2만4000TEU급 컨테이너운반선 ‘HMM 알헤시라스’호가 컨테이너를 만재하고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고 있다. 사진=HMM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지난 2007년 20세기 후반 세계를 바꾼 15인을 선정하면서 말콤 맥린(Malcom MacLean)이라는 인물을 포함했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지 모르겠으나 그가 발명한 제품은 최소 한 번 이상은 목격했을 것이다. 바로 ‘컨테이너 박스(Container Box, 이하 컨테이너)’다.

컨테이너는 1956년 4월 미국의 뉴욕-휴스턴 노선에 투입한 아이디얼X(Ideal-X)호에 처음으로 실렸다. 컨테이너는 당시 인건비를 36분의 1로 줄이고 화물 처리 시간을 75%나 줄였으며 오늘날까지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컨테이너 출현으로 국제 제품 무역이 꽃을 피웠고, 국가 간 경제의 상호작용도 더욱 활발해 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컨테이너 사용으로 물류비용 절감이 획기적으로 가능해졌기 때문에 생산자들은 토지와 인건비가 싼 저개발국으로 생산거점을 이동할 수 있고, 생산지의 경제 활성화도 촉진되었다. 다양한 제품이 컨테이너에 실려 세계 각지로 뻗어나갔고, 특정 지역에서 독점적인 시장 지위를 가지고 있던 제품은 싸고 좋은 다른 국가의 제품과 경쟁하게 되면서 소비자들은 더 싼 값에 좋은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작회사와 해운사마다 컨테이너 규격이 제각각이었으나 표준화 과정을 거친 끝에 지금은 운송 단계마다 화물 크기나 모양에 따라 어떻게 운반할지 고민할 필요없이 컨테이너를 신속하게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정몽구 회장, 신사업으로 ‘박스’ 낙점


세계 무역이 성장하면서 컨테이너 제조 산업 규모도 날이 갈수록 커졌다. 1960년대부터 다수의 업체들이 뛰어들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런데, 한국기업이 컨테이너 제조 시장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현대자동차써비스(현 현대모비스를 설립해 대표이사 사장에 오르며 경영자로서의 첫발을 내딘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1976년 5월 신사업 추진을 고민하다가 화물을 실어나르는 컨테이너에 주목했다.

현대그룹 자체 수출물량도 많았을 뿐 아니라 현대그룹은 울산시에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를 짓고 있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가 만든 상품을 현대가 만든 컨테이너에 싣고, 이 컨테이너를 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건조해 현대상선(현 HMM)에 인도한 컨테이너 화물선에 실어 전 세계로 보낸다면, 이만한 시너지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듬해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을 설립해 컨테이너 사업을 본격 추진했다. 정몽구 회장은 전문 인력 확보‧사업계획 수립‧생산공장 건설‧국내외 영업활동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신사업을 하루 빨리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는 의지에서다.

돌관작업으로 수행한 ‘110일 작전’


‘110일 작전’으로 불렸던 공장 건설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176년 11월 10일, 잡초만 무성한 황무지 벌판이었던 울산시 매암동 공장터에서 열린 착공식을 가진 뒤 24시간 공사를 중단없이 진행하는 돌관작업을 벌였다. 정몽구 회장은 공사 기간 내내 현장에서 직원들과 먹고 자며 현장을 직접 지휘했다. 예상대로 3개월 만인 1977년 2월 10일 5425m²(1641평) 규모의 1개 생산라인을 갖춘 1공장 A동이 완공됐다. 공장 가동 반년도 안돼 수요를 맞출 수 없을 만큼 컨테이너가 팔려나가자 정몽구 회장은 제조공정 시간을 줄이기 위해 A동 건물과 주조공장 건물 사이에 있던 길을 막고 임시 별도 공장을 건설, 여기서 컨테이너의 각 부분을 생산하고 정규 라인에서 조립하도록 했다. 별도 공장을 만드는 시간은 단 하루였다. 직원들은 다음날 이를 해내고야 말았다.

1978년 10월에는 매암동 1공장 B동과 염포동 부지에서 공사를 단행한 컨테이너 2공장을 완공했다. 현대정공의 컨테이너 생산량은 2년도 채 안돼 월 600대에서 6300대로 급증했다. 이는 당시 국내 컨테이너 총 생산량의 58%, 세계 생산량의 11.4%로 국내 컨테이너 제조업계 선두주자에 오른 것은 물론 당시 세계 1위였던 일본 도큐카에 견줄만한 규모였다.

공장 건설 전에 영업 시작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고 조선소를 짓기도 전에 초대형 유조선(VLCC)을 수주한 일화는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의 사례로 지금도 회자된다. 정몽구 회장도 마찬가지여서 컨테이너 공장을 건설하기도 전에 일본 등 전 세계를 다니며 바이어를 만났다.

공장을 안 보여주면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이어에게 정몽구 회장은 “현대의 신용과 품질을 인정하고 있으니, 최고 품질의 컨테이너를 만들어 주겠다”며 설득했다. 그 결과, 1977년 3월 일본 종합무역상사인 가네마쓰 고쇼(현 가네마쓰 상사)의 중계로 미국 컨테이너 리스업체인 유니플렉스로부터 첫 수주를 따냈다.

‘현대 컨테이너 표준’, 세계 표준으로


위에서 컨테이너 성공의 배경에는 표준화가 있었다고 했다. 정몽구 회장은 “컨테이너도 단순 철재 조립품에서 오픈탑(Open Top), 플랫백(Flat Back), 벌크(Bulk) 등 특수제품으로 세분화되는 추세로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설계 및 생산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며 표준화 작업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1979년 12월 ‘현대 컨테이너 표준(Hyundai Conrainer Standard)’이 공표되었다, 이를 통해 현대정공은 바이어가 주문하는 현재 어떠한 사양에도 대응할 수 있는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전 세계 컨테이너 사양 가운데 90% 이상이 현대 표준형 컨테이너 방식으로 전환될 정도로 현대정공의 컨테이너는 말 그대로 ‘세계 표준’이 됐다.

사업 7년 만에 세계 1위 등극


현대정공은 1980년 11월 누적 컨테이너 생산 10만대를 돌파해 단일회사 기준 최단 시기 최다 생산 기록을 달성했다. 1981년 무역의 날에는 컨테이너 단일 품목 1억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1983년에는 생산실적 기준 5만5000대로 세계시장 점유율 35%를 차지해 5만대에 머무른 경쟁사인 도큐카를 누르고 세계 최대 컨테이너 생산업체로 등극했다. 일본 해운 전문지 다이아몬드는 현대중공업이 1983년 건조량 기준으로 조선업계 세계 1위에 올라섰다고 보도했는데, 현대정공의 컨테이너가 간발의 차로 그룹 최초 세계 1위 상품에 이름을 올렸다.

자식에 대한 평가에 인색했던 정주영 명예회장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컨테이너의 성공은 사장(정몽구)의 능력이 우수하기 때문”이라고 인정했다.현대정공은 이해 우리나라 컨테이너 수출의 60% 이상을 달성하며 일본을 제치고 한국이 세계 1위 컨테이너 수출국이 되는데 기여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세계 컨테이너 업계의 설비과잉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산능력‧품질‧제품 다양화‧획기적인 영업방식을 적극 도입한 정몽구 회장의 경영수완이 거둔 성과였다.

"좋은 모습일 때 손 떼야" 23년 만에 사업 종료


맨 바닥에서 시작해 현대정공을 세계 1위 컨테이너 기업으로 키운 정몽구 회장은 사업도 직접 접었다. IMF 외환위기 사태 후 그룹 현대그룹 사업 구조개편 작업 과정에서 컨테이너 사업의 미래는 밝지 못하다는 분석이 나오자 좋은 모습이었을 때 손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0년 8월 30일. 울산시 매암동 현대정공 공장에서 컨테이너 사업 종료식을 갖고 공식적으로 철수했다. 이 자리에 정몽구 회장은 없었다.

23년간 현대정공은 총 266만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의 컨테이너를 생산했다. 전 세계 컨테이너 공급량의 30%에 달하는 양이다. 위로 쌓아올리면 에베레스트산 높이(8848m)의 600배, 한 줄로 이으면 지구의 반 바퀴에 달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정공의 후신인 현대모비스 30년사에서 “컨테이너 사업을 통해 현장경영과 품질경영의 중요성을 체험하고 지속할 수 있었고, 이는 저의 경영철학의 근간으로 자리잡았다”며 아쉬움을 남겼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미‧중 무역갈등이 지속하면서 해상운송망의 적체가 좀처럼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은 막강한 제품 생산력과 제조능력을 바탕으로 메이저 해운사를 자국 항구로 끌어들여 한국과 일본 패싱을 심화시키고 있다.

나아가 컨테이너 생산 시장에서 중국 기업이 사실상 100%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은 담합을 통해 컨테이너 생산을 줄여 컨테이너 가격 폭등을 조장하고 있다. 주요 기업들이 국영기업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중국 정부의 의도라는 분석이다.

한국은 한 때 세계 1위 컨테이너 생산국가였다. 원가 경쟁에 밀려 사업을 포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최소한의 생산 기반은 남겨두었어야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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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 산업부장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