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군산 앞바다에서 중국과의 교역 중에 침몰한 배에 실렸던 도자기들이 대거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물속에서 발견되는 오래된 도자기와 금속의 발견은 21세기에서도 흥미를 자아내는 장면이다.
60, 70년대 부산에서는 ‘적기만’ 노다지 이야기가 흥밋거리였다. ‘적기만’은 부산시 남구 용호동과 우암동 감만동 일대를 말한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제 122독고부대는 ‘적기만’에 해저 잠수함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인 돌격용 잠수정 특공대를 위한 기지였다. 독고부대는 패전이 확정적이자 보화를 적기만 해저동굴 군수창고 속에 감춰둔 채 급히 퇴각했다.
독고부대가 당시 파묻은 보물은 금괴 수백 톤과 금동불상 36좌, 은 350t, 비취불상 1좌, 다이아몬드 1,600개, 수은 텅스텐 니켈 200상자와 각종 패물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독고부대 사령관은 기지 내부와 배치도, 보물 내역 등을 담은 4장의 비밀지도만을 간직한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20년이 지나 소문으로 떠돌던 보물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지도를 입수한 사람은 잠수함기지 사령관의 여동생과 결혼한 김성태 씨라고 알려졌다. 그는 노년을 보물찾기에 올인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가산만 날린 채 1977년 작고했다. 김 씨는 공군 자위대에서 근무하던 중에 당시 잠수함기지 사령관이던 다카시마의 여동생과 결혼, 처남으로부터 이 지도를 입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1960년대 후반에 홀로 이 보물을 찾으려고 나섰으나 연합철강(현 동국제강 부산공장)이 이미 이 지역을 매립한 뒤라 가산만 날렸다. 1972년 김성태 씨는 동아대 지질학과 구준택 교수(1984년 작고)를 찾아가 미밀을 공개했다.
김 교수와 정찬영 씨가 매장 발굴 작업에 참여하면서 발굴 작업은 다시 가시화됐다. 1977년 11월 19일에 신동양건설이 도시고속도로 우암부두 진입도로 공사를 위해 남구 범3동 426 산기슭을 파헤치다가 길이 1㎞, 폭 2m, 높이 2m로 된 인조 석축굴을 발견하면서 적기만 보물 이야기가 크게 회자됐다.
부산시와 부산시경까지 나서서 보물 이야기를 검증하게 되었고 언론도 대서특필했다. 이 일은 다시 흐지부지되다가 1979년 12월 발굴팀이 용호동 바닷속에서 해상통로로 짐작되는 지름 3~4m, 길이 40m 가량의 수중통로를 발견하면서 다시 화제가 됐다. 이 굴은 해저에 설치된 철도 레일과 어뢰 한 정과 함께 발견됐다고 한다.
1982년 1월은 보물 소동이 최고조에 달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재력가들이 자금을 대고 발굴허가권을 지닌 육군본부의 승인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발굴 기간이 끝나도록 보물은 나오지 않았고 파헤쳐진 부분은 다시 메워졌다.
지금도 동국제강 부산공장과 이웃하고 있는 군부대 인근 지역에는 땅굴이 파헤쳐지고 있다고 하는데 보물찾기는 인간의 욕망을 자꾸 흔드는가 보다.
김종대 글로벌철강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