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철교이다. 한강철교가 없던 시절 서울서 인천까지는 육로로 12시간, 배편으로도 8시간이나 걸렸다. 일제 강압 시기에 한강에 철교가 건설되고 경인선이 개통되자 서울-인천은 1시간대로 대폭 줄었다.
한강철교에는 1200톤의 철강재가 쓰였다. 상부구조를 이루는 철재는 61m 규격의 미국산 철강재였다. 한강 수면에서부터 교각까지의 높이는 11.2m이다. 제1‧2철교는 단순 와렌(warren) 트러스 구조이고 제3철도교는 연속 더블 와렌(warren) 트러스 구조이다.
트러스교(Truss bridge)는 삼각형으로 연결된 트러스의 강성을 이용한 교량을 말한다. 과거의 철교에는 트러스 구조를 많이 사용했지만 현재는 기피하는 방식이다. 성산대교, 성수대교 등도 트러스 방식이다.
영국인들이 자랑하는 철구조물 포스레일브릿지가 건설되기 이전에 테이브릿지(Tay Bridge)가 붕괴되었다. 70명의 인명이 사망했다. 붕괴원인은 불량 주철을 사용한 것이다. 영국 전체가 시끄러웠다. 이런 과정을 겪은 영국인들은 포스레일브릿지 소재를 주철과 연철에서 강철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강철을 사용한 첫 번째의 다리가 포스레일브릿지이다.
포스브릿지는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서쪽 약 14㎞ 지점에 놓여 있는 2개의 웅장한 교량을 말한다. 이 다리는 포스만(灣)을 가로질러 에든버러와 세인트 앤드류를 이어주는 철도교와 도로교이다. 철도교는 포스레일브릿지, 도로교는 포스로드브릿지(Forth Road Bridge)로 불린다.
포스레일브릿지는 건설될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강철 철교였다. 지금도 스코틀랜드의 명물로 인정받을 만큼 자태가 매우 웅장하다. 이 교량은 1883년 착공해 1890년 3월 4일 완공된 이후로 ‘강철(鋼鐵) 공룡’으로 불리며 19세기를 대표하는 영국 토목 기술의 상징이었다. 포스레일브릿지는 멀리서 보면 거대한 철구조물 3개가 강 위에 떠 있는 듯하다. 좀 더 가까이 가 보면 크기에 위축될 만큼 웅장하고 철의 쓰임새가 엄청나다.
이곳을 방문해본 사람들이라면 “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강 주변 공간에는 공사 중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철로 만든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인근 벤치에서 이 조형물과 다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추억 거리를 만들 수 있다. 1800년대에 이렇게 엄청난 다리를 만든 영국인들의 기술에 감탄하게 된다.
포스레일브릿지의 철제구조물 자체는 아름다운 조각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리에 칠해진 페인팅의 색깔은 붉은색 계열이다. 포스만에 철교와 육로가 없었을 때, 선박에 차를 싣고 포스만(Firth of Forth)을 건너갔던 시대를 상상해 보면 포스레일브릿지는 엄청난 역사였다.
포스레일브릿지는 켄틸레버 트러스(cantilever truss)구조이다. 진입도로를 포함하여 2㎞가 넘는 장대교이므로 당시로서는 세계 제일의 교량이었다. 높이는 48m, 주탑까지의 높이는 무려 137m나 된다. 포스레일브릿지에 사용된 철강재는 5만4160톤이다. 철구조물을 이어 붙인 리벳의 개수도 650만개이며 리벳의 무게만 4200톤에 달한다.
당시의 철강 생산기술로는 1% 정도의 탄소 함유량을 지닌 강철을 생산해 내기가 어려웠다. 그랬으니 강철로 교량을 만든 영국의 높은 철강 기술을 포스레일브릿지가 증명하는 셈이다.
설계자 벤저민 베이커는 제철 기술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교량의 주재료로 강철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테이브릿지의 붕괴로 주눅 들어있던 영국 정부의 “무조건 튼튼한 교량”이라는 주문과 일치했다.
베이커가 제시한 인간 다리 모델 즉, ‘홀바인 앙버팀’ 방식은 1887년 왕립학회에 포스철도교를 지탱하는 켄틸레버의 원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세 사람이 줄 위에 걸터앉은 이유는 양쪽으로부터 중앙을 향해 솟아나온 트러스의 도리에 의해 중앙의 트러스가 지탱되고 있음을 설명한다.
베이커의 일본인 제자였던 와타나베 가이치는 일본 고우부 대학(현 도쿄대학의 전신)을 수석 졸업한 인물로 일본 토목사에 수많은 공적을 남겼다고 한다. 와타나베를 보면서 일본인들은 이미 19세기에 유럽에서 신기술을 익혔음을 엿볼 수 있다.
포스레일브릿지에 쓰인 강철은 당초에 4만2000톤을 예상했으나 안전을 고려하여 당초보다 21%나 증가시켰다. 이렇게 포스레일브릿지는 테이브릿지 붕괴라는 트라우마 때문에 ‘무식하지만 튼튼한 교량’의 모습으로 탄생하게 됐다. 1890년 복선 철도교로 완성된 포스레일브릿지는 찬사와 함께 호된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예술 평론가들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철의 괴물”이라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산물이다. 괴물공룡 브론토 사우루스의 기술”이라는 악평도 나왔다.
그리고 각국의 교량기술자로부터는 “포스브리릿는 과잉설계였다”는 평가에서부터 “극히 쓸모없는 구조를 가진 무용지물”, “구조물에 비해 지극히 많은 자금이 들어간 교량”이라고 했다. 포스레일브릿지 서쪽에는 또 하나의 교량이 있다.
포스로드브릿지이다. 포스레일브릿지가 개통된 지 약 70여년이 흐른 1964년 9월 4일 준공됐다. 길이는 2517m이며, 4차로의 현수교다. 개통될 때는 유럽에서 최장 현수교였다.
‘하늘의 고속도로(Highway in the Sky)’로 불렸던 포스로드브릿지는 24시간 감시시스템이 운영된다. 하지만 이 교량이 개통되자 800년간 운행하던 페리선박(정기 운항선) 운영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포스로드브릿지에는 3만9000톤의 철강재가 사용됐으며, 주경간 1006m, 북측 및 남측 경간 408m, 주탑 높이 156m, 북쪽과 남쪽에 있는 257m와 438m의 고가교로 구성됐다. 교량의 케이블은 직경 603mm로 각각 1만3800톤의 교량 하중을 커버한다.
이 교량은 개통 첫해 차량 250만대가 통행했고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이 다리는 출퇴근 시간에는 만성적인 정체 구간으로 변한다. 에딘버러 쪽의 직장인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포스만에 두 교량이 없었다면 영국인들은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한다. 길은 통로를 만들고, 교량은 물자와 사람, 그리고 문화와 문명을 교류시킨다. 그 속에서 철강재는 안심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