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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의 여유] 오늘은 과거의 미래다, ‘20세기 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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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의 여유] 오늘은 과거의 미래다, ‘20세기 경제사’

20세기 경제사 / 브래드퍼드 들롱/ 생각의힘이미지 확대보기
20세기 경제사 / 브래드퍼드 들롱/ 생각의힘
유토피아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를 말한다. 16세기 토머스 모어가 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에서는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 경제적으로는 공산주의 체제이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채택하여 교육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이상적인 국가를 지칭한다.

토머스 모어 이전도 이후도 인류는 태초 이래 늘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다. 천지만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전해지는 궁극의 공간 '에덴'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결속시키는 시오니즘의 근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영국 국왕의 박해를 받던 청교도들에겐 신대륙이, 가난에 시달리던 이민자에겐 그 신대륙에 세워진 미국이 유토피아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유토피아일까? 이 질문에 대해 UC버클리대 경제학 교수 브래드퍼드 들롱은 두 가지 상반된 답변이 다 가능하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들을 짚어볼 때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빈부격차, 기후위기, 정치적 극한 대립, 주기적으로 발발하는 팬데믹 등을 볼 때 지금 세상은 디스토피아가 분명하다. 반면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절대빈곤층의 비율이 줄어든 시기가 없으며, 절대다수는 전쟁의 위협과 생존의 위기를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 빈곤층조차 각종 사회보장제도와 기본적인 의료혜택은 받을 수 있다는 점 등을 볼 때 상대적인 유토피아의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들롱 교수는 이러한 담론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을 제시한다. 이른바 ‘장기 20세기’라는 것으로 1870년부터 2010년까지 기간을 일컫는다. 1870년 이후부터 나타난 변화들 - 기업 연구소, 근대적 대기업, 세계화 등 – 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다. 들롱 교수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세계 평균 성장률은 1870년 이전에는 연 0.45%였는데, 1870년 이후에는 연 2.1%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경제 규모는 1870년 이래 140년 동안 21.5배로 커졌고, 인구 증가에 따른 효과 등을 감안해도 인류는 대략 8.8배 더 잘 살게 됐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에릭 홉스봄은 1914년 발발한 1차 대전부터 1991년 소련 몰락까지의 기간을 사회주의와 파시즘이 세계를 뒤흔든 ‘단기 20세기’로 규정한다. 반면 들롱은 1870년부터 2010년까지 140년간 이어진 일련의 흐름에 주목한다. 그가 포착한 장기 20세기의 인류사적 의미는 크게 5가지다. 첫째, 경제 문제가 역사를 지배하는 세기가 되었다. 둘째,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서로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세계화가 시작되었다. 셋째, 인간의 기술적 지식의 폭발이 일어났다. 넷째, 정부는 관리의 실패에 봉착했다. 다섯째, 각종 형태의 폭정이 더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 양상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어디에서 시작되고 전개됐는지 ‘20세기 경제사’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클린턴 행정부의 재무차관보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앞장서 펼친 당사자로서 지난 세기의 공과(功過)를 있는 그대로 논하려는 것이 이 책의 집필 목적 중 하나라고 한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촉발된 세계화의 시작부터, 제1·2차 세계대전, 대공황, 냉전을 관통해 데탕트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체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침체기까지 지난 140년간 켜켜이 쌓인 인류 근현대사의 나이테를 톺아본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이 모든 현실의 씨앗이 길게는 140년 전, 짧게는 14년에 심겨 있었다는 사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그것이 싹이 트고 자라 지구 곳곳에 깊이 뿌리내렸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책의 원제(Slouching towards utopia)처럼 유토피아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인류는 아주 천천히 웅크리며 머나먼 그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오늘을 잉태한 과거를 뒤로한 채, 미래에 나타날 오늘을 딛고서.

양준영 교보문고 eBook사업팀 과장



조용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yccho@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