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 이전도 이후도 인류는 태초 이래 늘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다. 천지만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전해지는 궁극의 공간 '에덴'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결속시키는 시오니즘의 근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영국 국왕의 박해를 받던 청교도들에겐 신대륙이, 가난에 시달리던 이민자에겐 그 신대륙에 세워진 미국이 유토피아로 여겨졌을 것이다.
들롱 교수는 이러한 담론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을 제시한다. 이른바 ‘장기 20세기’라는 것으로 1870년부터 2010년까지 기간을 일컫는다. 1870년 이후부터 나타난 변화들 - 기업 연구소, 근대적 대기업, 세계화 등 – 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다. 들롱 교수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세계 평균 성장률은 1870년 이전에는 연 0.45%였는데, 1870년 이후에는 연 2.1%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경제 규모는 1870년 이래 140년 동안 21.5배로 커졌고, 인구 증가에 따른 효과 등을 감안해도 인류는 대략 8.8배 더 잘 살게 됐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그 양상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어디에서 시작되고 전개됐는지 ‘20세기 경제사’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클린턴 행정부의 재무차관보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앞장서 펼친 당사자로서 지난 세기의 공과(功過)를 있는 그대로 논하려는 것이 이 책의 집필 목적 중 하나라고 한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촉발된 세계화의 시작부터, 제1·2차 세계대전, 대공황, 냉전을 관통해 데탕트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체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침체기까지 지난 140년간 켜켜이 쌓인 인류 근현대사의 나이테를 톺아본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이 모든 현실의 씨앗이 길게는 140년 전, 짧게는 14년에 심겨 있었다는 사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그것이 싹이 트고 자라 지구 곳곳에 깊이 뿌리내렸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책의 원제(Slouching towards utopia)처럼 유토피아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인류는 아주 천천히 웅크리며 머나먼 그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오늘을 잉태한 과거를 뒤로한 채, 미래에 나타날 오늘을 딛고서.
양준영 교보문고 eBook사업팀 과장
조용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yccho@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