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봄에 진달래꽃 만개했을 때 신선대에 오른 이후로 다시 찾은 도봉산은 한껏 무성해져서 녹음이 짙어질 대로 짙어졌다. 여름 숲은 무성하고 향기롭다. 한줄기 소나기라도 지나가면 숲은 비릿한 풀 비린내로 인해 육감적으로 다가온다. 그 무성한 여름 숲에 들어서자 문득문득 꽃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꽃향기를 따라 고개를 돌리면 산길 곳곳에 각시원추리·산나리·까치수염 같은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나를 반겨준다. 도봉산은 다양한 등산로가 있지만 나는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주 등산로를 택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5월 발을 다친 후 첫 산행이라 조심스러웠다. 그저 정상에 올라 서울 시내를 굽어보며 그간의 답답함을 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이른 시간에 산을 오르기 시작해서인지 등산로는 한적하다. 정상에서 일출을 보려는 목적이 아니더라도 여름 산행은 일찍 서두르는 게 좋다. 일단 햇살이 퍼지면 기온이 급격히 올라가기 때문에 땀도 많이 흘리게 되고, 체력도 빠르게 소진되어 쉬 지치기 쉽기 때문이다. 쉬엄쉬엄 산을 올랐다. 천축사를 지나 마당바위에 도착했을 때 몇 무리의 등산객이 먼저 와 있었다. 잠시 앉아 다리쉼을 하며 가져온 간식과 물을 마시고 다시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위 틈새에 노란 돌양지꽃과 은꿩의다리가 해사한 얼굴로 나를 반긴다. 녹음이 짙어진 여름 산에서 만나는 꽃들은 유난히 귀하고 반갑다.
철제 난간에 매달려 신선대 정상에 오르니 산바람이 산을 오르느라 흘린 땀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햇살이 쨍하건만 산바람이 시원해서인지 오히려 한기가 느껴질 지경이다. 집 안에서 에어컨과 선풍기를 틀어놓고 더위에 허덕이던 시간이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진다. 청명한 날씨 덕분에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건너편의 불암산·수락산과 도봉산과 잇닿은 사패산도 짙푸른 숲 위로 화강암의 암봉들을 곧추세운 채 든든한 나의 배경이 되어준다. 산에 오르지 않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풍경이다. 옛날 여승이 쓰던 모자 송낙을 쓴 부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는 불암산과 산 높이에 비해 경사가 가파르고 뾰족한 수락산, 도봉산과 북한산의 명성에 가려진 덕에 자연환경이 더 잘 보존된 사패산까지 찬찬히 눈에 담을 수 있으니 어찌 산을 오르지 않겠는가.
천천히 산을 내려오며 눈에 띄는 꽃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가장 많이 본 꽃은 은꿩의다리다. 화강암의 바위틈에 다보록이 피어 바람을 타고 있는 모습에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 외에도 돌양지꽃·바위채송화·각시원추리·까치수염·칡꽃까지 제법 많은 꽃이 눈에 띄었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꽃들은 피어나고, 누가 돌보지 않아도 숲은 절로 푸르러져 간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 푸른 숲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가까이에 살고 있다는 게 큰 축복처럼 느껴진다. 우울하거나 마음 쓰이는 일이 있을 때면 나는 숲을 찾아간다. 짙푸른 여름 숲에 들면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지친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주고 싶어진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