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회생협회 윤병운 회장 칼럼
이미지 확대보기요즘 기업 경영 현장에서 ESG라는 단어를 빼놓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란 쉽지 않다.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 이 세 축이 기업 평가의 핵심 지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글로벌 연기금과 기관투자자들은 이미 ESG 스코어를 투자 의사결정의 필수 요소로 삼고 있고, 국내 자본시장에서도 ESG 공시 의무화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그런데 정작 우리 사회는 재무적 위기를 겪은 기업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꽤 불편한 자화상과 마주하게 된다.
한국기업회생협회가 추진하는 '회생기업 재도전 프로젝트', 이른바 'RE-Challenge'는 바로 그 불편한 지점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부도 위기를 넘긴 기업들을 응원하는 캠페인이 아니다. ESG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 즉 사회적 포용성(Social Inclusion)과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기업 회생의 언어로 번역한 매우 전략적인 과업이다.
"S" 는 사회안전망이다 — 회생기업의 재기가 곧 고용 복원력
기업 하나가 무너진다는 건 단순히 하나의 법인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 기업과 연결된 수백, 수천 명의 근로자와 가족들, 그리고 납품·유통·서비스를 담당하는 협력 생태계 전체가 연쇄 충격에 노출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고용 승수 효과' 를 거꾸로 적용하면, 기업의 붕괴는 지역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부(負)의 외부효과를 낳는다.
반대로, 회생 기업이 정상화 궤도에 진입한다는 건 이 외부효과의 방향이 바뀐다는 뜻이다. 고용이 유지되고, 협력사의 수주가 살아나며, 지역 상권이 회복된다. 이것이야말로 ESG 보고서에서 목표로 삼는 '사회적 가치 창출(Social Value Creation)' 의 가장 생생한 현장이다.
여기에 더해, RE-Challenge가 확산시키는 '실패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문화적 서사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선다. 이는 기업가 정신의 사회적 자본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실리콘밸리의 혁신이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회생기업에게 다시 뛸 기회를 주는 것은, 그 자체로 혁신 생태계의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사회적 투자다.
"G" 는 공정한 평가 시스템이다 — DIP 금융과 규제 혁신의 방향
현재 한국의 신용평가 및 금융 접근 시스템은 회생 절차를 거친 기업에 대해 사실상 '낙인 효과(Stigma Effect)' 를 부여한다. 과거의 재무적 실패가 현재의 기업 가치와 미래 성장 가능성보다 훨씬 큰 가중치를 갖는 구조다. 이것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시장 원리에도, 미래지향적 평가를 강조하는 ESG 원칙에도 어긋난다.
한국기업회생협회가 요구하는 인가 기업 이행보증제도 개선과 재도전 특화 신용평가 모델 도입은 이 구조적 문제를 바로잡는 거버넌스 혁신의 핵심이다. 기업의 '과거 기록'이 아닌 '현재 역량과 미래 현금흐름'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으로의 전환, 이것은 자본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고 금융 선진화를 앞당기는 제도적 진화다.
이와 맞물려 DIP(Debtor in Possession) 금융의 확대는 국내 기업 회생 시스템에서 시급히 논의돼야 할 과제다. DIP 금융은 법정관리(기업회생) 중인 기업이 기존 경영진의 주도 아래 운영되면서 필요한 유동성을 외부에서 조달하는 방식으로, 미국 챕터11(Chapter 11) 절차에서 적극 활용돼 온 검증된 기제다. 계속기업가치가 청산가치를 상회하는 기업에 적시에 자금을 공급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부가가치 손실을 최소화한다. 이는 단순한 금융 지원이 아니라, 시장 자원 배분의 지능을 높이는 정책적 판단이다.
ESG와 사회적 경제의 교차점 — 회생기업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회생기업이 단순히 '살아남는 것'에서 나아가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 생태계와 연결된다면, 이는 ESG 경영의 가장 진화된 형태를 보여주는 통합 모델이 된다.
경영 정상화를 거친 회생 기업이 임팩트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거나, 사회적 기업·협동조합 등과 공급망을 형성하는 방식은 경제적 회복과 사회적 가치 창출을 동시에 달성하는 구조다. 이는 최근 글로벌 ESG 평가기관들이 강조하는 '이중 중요성' 원칙, 즉 기업이 사회·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사회·환경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모두 고려하는 접근법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브랜드 전략의 측면에서도 회생기업의 스토리는 강력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소비자들이 해당 기업의 회생 서사에 공감하고 구매를 통해 재기를 응원하는 '컨셔스 컨슈머리즘' 현상은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검증된 트렌드다. 위기를 딛고 일어선 기업의 진정성 있는 스토리텔링은, 어떤 광고 캠페인보다 강력한 ESG 브랜딩 자산이 된다.
중소기업 생존과 경제 회복탄력성의 문제
인구 구조의 고령화와 기술 패러다임의 급격한 전환 속에서, 기업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빠른 주기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대기업은 내부 유보금과 그룹 차원의 자구 능력이 있지만, 중소기업은 한 번의 유동성 위기가 곧 시장 퇴출로 이어지기 쉬운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다.
한국기업회생협회의 활동은 이 취약한 고리를 붙잡는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을 한다. 회생 기업을 돕는 것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사회적 빈곤의 예방과 시장 질서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거시경제적 공공재의 성격을 갖는다. 이는 ESG에서 말하는 '사회적 포용성(Social Inclusion)' 을 제도와 실무의 언어로 구현하는 가장 현실적인 경로다.
회생을 넘어 '지속가능한 동행'으로
ESG는 결코 대기업의 전유물도, 화려한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속 활자도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어렵게 버티고 있는 회생기업들이 규제의 벽을 넘어 다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제도와 문화를 바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ESG의 가장 강렬하고 실질적인 실천이다.
RE-Challenge가 지향하는 가치는 한 기업의 생존을 돕는 것을 넘어, 실패를 수용하고 재기를 응원하는 사회의 포용력을 측정하는 지표가 된다. 이 노력이 정책적 뒷받침과 사회적 공감대를 얻을 때, 우리 경제는 어떤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ESG 기반의 지속가능 생태계로 성숙해 갈 것이다.
회생기업의 재도전은 대한민국 경제가 가진 회복탄력성의 증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가장 값진 사회적 자산이다.
임광복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ac@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