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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100달러 시대, 외국인 '8조 반도체' 던지고...'방어·인프라'로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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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100달러 시대, 외국인 '8조 반도체' 던지고...'방어·인프라'로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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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거래소
미국과 이란 사이의 전운이 감돌며 국제 유가가 한때 배럴당 100달러 선을 돌파했다. 세계 에너지의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될 위기에 처하자, 글로벌 금융시장은 인플레이션 재점화와 공급망 마비라는 '퍼펙트 스톰' 공포에 휩싸였다. 에너지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증시는 거센 풍랑 앞에 놓였지만, 시장의 풍향계인 외국인 투자자들의 움직임은 지극히 냉철했다. 3월 들어 10일까지 외국인의 행보는 단순한 투매가 아닌, 위기 이후의 산업 지형도를 새로 그리는 '전략적 대이동'이었다.

■ '비용 쇼크' 피해 저변동성 우선주와 금융·지주사 결집

이번 매집 현황에서 가장 독보적인 대목은 삼성전자우다. 외국인은 본주인 삼성전자를 무섭게 내던지면서도, 우선주만큼은 3714억 원어치나 사들였다. 불확실성이 극에 달한 장세에서 상대적으로 배당 매력이 높고 변동성이 낮은 우선주를 선택해 '현금 흐름'이라는 방어막을 친 것이다.

금융 및 지주사 업종으로의 자금 유입도 뚜렷하다. 삼성생명(1359억 원), 신한지주(1000억 원), 하나금융지주(471억 원) 등 금융 대형주와 SK스퀘어(1258억 원), LG(574억 원), 삼성물산(462억 원) 같은 지주사가 순매수 상위권에 포진했다. 이는 금리 상승 압력과 시장 변동성 확대 국면에서 '기업 밸류업' 모멘텀이 살아있는 종목으로 대피해 하방 경직성을 확보하려는 고도의 계산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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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거래소
■ 고유가의 역설...조선·인프라와 '알테오젠'의 급부상

지정학적 리스크는 역설적으로 조선 및 에너지 인프라 업종에 강력한 모멘텀이 됐다. 외국인은 HD현대중공업(1473억 원)과 현대건설(1129억 원)을 중심으로 삼성중공업(602억 원), HD한국조선해양(485억 원)을 바구니에 담았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장기화 시 LNG선 등 에너지 운반선 수요 폭증과 운임 상승 수혜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미래 성장주 중에서는 실적이 뒷받침되는 '대장주' 선별이 엄격했다. 셀트리온(2110억 원)과 한미약품(893억 원)은 물론, 최근 무서운 기세로 급부상한 알테오젠(1055억 원)을 1000억 원 이상 순매수하며 제약·바이오가 위기 국면에서 경기 방어적 성격과 성장성을 동시에 갖췄음을 증명했다. 아울러 에이피알(803억 원), 하이브(498억 원) 등 K-뷰티와 콘텐츠 섹터에도 자금을 분산하며 순환매 장세에 대비했다.

■ 차가운 이면...반도체·자동차 '8조 원대' 엑소더스

외국인의 매수세 뒤에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냉혹한 '가지치기'가 존재했다. 외국인은 삼성전자(-6조 207억 원)와 SK하이닉스(-2조 3561억 원) 두 종목에서만 무려 8조 3700억 원에 달하는 물량을 쏟아냈다. 고유가에 따른 에너지 비용 상승이 반도체 제조 원가를 압박하고, 글로벌 경기 둔화가 가시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한국 증시의 심장'을 멈춰 세운 것이다.
자동차 업종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현대차(-9989억 원)는 1조 원에 육박하는 매도 폭탄을 맞았고, 기아(-2730억 원)도 매도 압력을 피하지 못했다. 물류비용 폭등과 가계 소비 위축이라는 이중고가 반영된 결과다.

■ '뉴스에 팔았다'...방산주와 정유주의 배신

가장 주목할 점은 위기 국면에서 수혜가 예상됐던 종목들의 이탈이다. 지정학적 리스크의 최대 수혜주로 꼽혔던 LIG넥스원은 7071억 원의 순매도를 기록하며 매도 상위 4위에 올랐다. 위기가 고조되는 시점을 틈타 대규모 차익 실현에 나선 '기민함'을 보인 것이다. 유가 급등의 수혜주인 S-Oil(-3444억 원)마저 매도 상위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는 정제마진 개선보다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파괴 우려가 더 컸음을 시사한다. 이외에도 에코프로(-1854억 원), 삼성SDI(-1406억 원) 등 이차전지 섹터에서도 자금 유출이 이어졌다.

■ '실적 자생력'과 '방어적 포트'가 생존 열쇠

3월 초 외국인의 매매 패턴을 종합하면, 핵심은 '고비용 구조를 견딜 수 있는 체력'이다. 에너지 리스크에 취약한 제조업과 대형 IT주는 잠시 내려놓고, 고유가 환경에서 몸값이 높아지는 조선업과 금리 상승기에 방어력이 강화되는 금융업, 그리고 개별 모멘텀이 확실한 바이오로 자금을 옮기는 '그레이트 로테이션'이 진행 중이다.

시장은 공포에 질려 있지만, 외국인은 이미 그 너머의 '생존 지도'를 그리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개인 투자자들 역시 지수의 흔들림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외국인이 반도체를 팔아 확보한 '8조 원의 실탄'이 어디로 스며들고 있는지 냉철하게 들여다볼 때"라고 지적했다.


장기영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kyjangmon@g-enews.com

[알림] 본 기사는 투자판단의 참고용이며, 이를 근거로 한 투자손실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