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능 ‘시한폭탄’ 제거와 북극 지배력 강화라는 상반된 목표 충돌

러시아 정부 2026년 연방예산안에는 '원자력에너지와 산업단지 개발' 프로그램 아래 북극 해역 방사능 위험 제거 예산이 대거 편성됐다. 2026년 1억2600만 달러(약 1794억 원), 2027년 1억2900만 달러(약 1830억 원), 2028년 1억2700만 달러(약 4172억 원) 등이다.
이 사업은 2012년부터 논의됐지만, 전문 장비와 훈련된 인력 부족, 높은 핵안전 위험 탓에 수년간 미뤄졌다. 로스아톰은 2021년 핵잠수함 인양 비용을 2억9300만 달러(약 4172억 원)로 추산했으나, 실제 투입 예산은 이를 크게 웃돈다.
140명 방사능 피폭에 9명 숨진 K-27
인양 대상은 K-27과 K-159 두 척이다. K-27은 납-비스무트 액체금속 냉각로를 장착한 실험용 잠수함으로 1963년 취역했다. 1968년 5월 원자로 사고로 승무원 140명 넘게 방사능에 피폭됐고, 9명이 숨졌다. 소련 당국은 1981년 이 잠수함을 카라해 스테포보이만에 수심 75m 깊이로 가라앉혔다.
이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정한 최소 3000m 수심 요건을 크게 어긴 조치였다. 러시아 비상사태부는 2006년 이 해역을 조사한 뒤 방사능 수치가 안정적이라고 밝혔지만, 환경 전문가들은 선체가 부식되면 방사능 물질이 새나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K-159는 1963년 취역해 1989년 퇴역한 노벰버급 공격잠수함이다. 2003년 8월 30일 그레미하 해군기지에서 해체를 위해 네르파 조선소로 끌려가던 중 킬딘섬 인근 바렌츠해에서 침몰했다. 사고로 승무원 9명이 숨졌으며, 800kg의 사용후 핵연료가 수심 250m 해저에 가라앉았다.
노르웨이 해양연구소 모델링 연구를 보면, K-159 원자로에서 세슘-137 전량이 빠져나올 경우 바렌츠해 동부 해역 대구 방사능 농도가 최대 100배까지 늘어날 수 있다. 이는 국제 기준치 아래지만, 해당 어류 시장성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
북극 전략 자산 확보와 핵유산 처리 딜레마
러시아가 이 시점에 잠수함 인양 사업을 다시 추진하는 배경에는 북극 지배력 강화 전략이 깔려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북극을 "군사, 정치, 경제, 기술, 환경, 자원 등 국가안보 모든 면을 실현하는 지역"으로 규정해 왔다.
러시아는 북극권에서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덴마크와 함께 배타적 경제수역을 주장하지만, 국제법상 북극점이나 북극해 자체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 지역은 전 세계 미발견 석유 매장량 16%, 천연가스 30%, 천연가스액 38%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북극해항로(NSR)는 러시아 전략 핵심 자산이다. 로스아톰 알렉세이 리하초프 사장은 지난달 15일 2024년 북극해항로 화물 운송량이 3790만t에 이르렀으며, 올해는 20%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고 밝혔다.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첫 북극 컨테이너 항로가 지난 14일 열렸으며, 기존 남방 항로보다 20일이나 줄어드는 시간 이점을 입증했다.
하지만 북극 개발과 함께 소련 시대 핵유산 처리는 러시아에 이중 부담이 된다. 북극 해역에는 1만 8000개 침몰 자산이 방사능 위험을 안고 있으며, 이 가운데 1000개가 여전히 위협을 가한다. 이들은 잠수함, 원자로, 고준위 폐기물 등을 포함한다.
국제 협력 끊겨 기술 난제 봉착
러시아 핵잠수함 인양 사업은 우크라이나 침공 뒤 국제 협력이 끊기면서 심각한 기술 난제에 부딪혔다. 1990년대부터 노르웨이는 러시아 북극 핵폐기물 처리에 약 20억 크로네(약 2831억 원) 넘게 지원해 왔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도 잠수함 인양 타당성 조사를 추진했으나,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뒤 모든 지원을 중단했다. 2022년 9월 러시아 정부와 과학자들이 모여 인양 작전 재개 방안을 논의했지만, 결정적 문제는 러시아가 이 작전을 수행할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2001년 쿠르스크호 인양 작전은 네덜란드 인양선이 맡았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 탓에 서방 기술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홀로 선체 손상 없이 방사능 유출을 막으면서 잠수함을 인양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벨로나재단 프레데릭 하우게 회장은 "북극 핵 정화 작업은 끝나지 않았으며, 안드레예바만과 북극 해저에는 여전히 확보해야 할 방사성 폐기물과 사용후 핵연료가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러시아 정화 완료 선언이 서방 국가들한테서 재정 지원을 얻어내려는 "핵 협박"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북극은 기후변화로 올해 여름 바닷물이 얼어서 생긴 얼음이 사라진 바다가 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지정학 중요성이 급증한다. 러시아는 북극 군사력 증강, 미국은 전략 재배치, 중국은 경제 투자 확대로 맞서는 가운데, 핵안전 문제는 환경 재앙으로 번질 잠재 위험을 안고 있다는 평가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