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제재 동참 후 中 고객사 줄줄이 퇴출…화웨이 우회로 원천 봉쇄
AI 훈풍에 엔비디아·애플 최대 고객 부상…TSMC 실적 고공행진
AI 훈풍에 엔비디아·애플 최대 고객 부상…TSMC 실적 고공행진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가 애플과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칩 주문에 힘입어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했다. 그러나 화려한 실적 발표 이면에는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의 서슬 퍼런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고 IT전문 매체 디지타임스가 20일(현지시각) 보도했다. TSMC가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제재에 발맞춰 중국 기업들의 주문 심사를 대폭 강화하면서, 한때 주요 고객이었던 중국 기업들이 사실상 '돈줄'이 막힌 채 고사 위기에 처했다.
TSMC는 최근 3분기 실적 발표에서 올해 연간 달러 기준 매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보다 높은 약 35%로 올렸다. 매출 규모는 약 1220억 달러(약 173조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이러한 폭발적인 성장은 AI 시대의 최대 수혜주로 꼽히는 엔비디아와 전통의 강자 애플이 이끌었다.
하지만 업계 공급망 소식통에 따르면, 이런 장밋빛 전망과 달리 TSMC의 중국 사업은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특히 미국의 제재를 우회해 화웨이의 첨단 칩 생산을 도왔다는 의혹을 받은 중국의 AI 칩 설계 기업 '소프고(Sophgo)'가 TSMC의 공급망에서 완전히 퇴출당했다. 한때 TSMC 전체 매출의 4% 가까이를 차지했던 중국 최대 암호화폐 채굴기 업체 '비트메인(Bitmain)'의 주문량 역시 반 토막 나며 그 비중이 2%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화웨이의 그림자, '소프고'의 퇴출
논란은 지난 2025년 4월, 캐나다의 반도체 분석 전문기관 테크인사이츠(TechInsights)가 화웨이의 AI 칩 '어센드(Ascend) 910C'를 분해한 결과물을 공개하면서 본격화했다. 분석 결과, 해당 칩에서는 TSMC를 비롯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이 제조한 최첨단 부품들이 드러났다.
이에 TSMC는 "2020년 9월 중순을 기점으로 화웨이에 대한 모든 반도체 공급을 중단했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후 테크인사이츠가 추가로 공개한 분석에서도 동일한 공급업체들의 부품이 또다시 확인되면서 의혹은 더욱 증폭됐다. TSMC는 뒤늦게 "분석에 사용된 칩은 2025년 이전에 생산된 구형 제품이며, 새로 생산하거나 기술을 높인 버전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소프고는 2023년과 2024년 TSMC 전체 매출의 약 1%를 차지하는 주요 고객사였다. 그러나 2025년에 들어서면서 이 수치는 '0'으로 수렴했다. 문제가 된 어센드 910C 칩이 생산된 시점은 2024년 말로, 소프고와 화웨이의 연관성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미국의 제재가 본격화하기 직전이었다. TSMC는 미국의 강력한 압박에 따라 모든 사업 관계를 끊었다.
1% 미만 거래도 거부…'우회로' 원천 봉쇄
TSMC의 조치는 소프고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현재 TSMC는 중국과 연관된 모든 주문에 대해 기존보다 훨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심사하고 있다. 전체 매출의 1% 미만을 차지하는 소규모 거래일지라도 미국의 제재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면 예외 없이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원천 봉쇄 조치로 중국 기업들이 TSMC를 통해 첨단 칩을 확보하려던 모든 우회로가 사실상 막혔다. 이러한 봉쇄 조치는 역설적으로 중국 정부가 자국 파운드리 기업인 SMIC와 화웨이를 중심으로 7나노급 이하 심자외선(DUV) 공정 기술 개발에 더욱 사활을 걸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AI 시대, TSMC의 고객 지형을 바꾸다
TSMC의 상위 10대 고객사 명단은 현재 세계 기술 산업의 지각 변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AI 혁명의 파도가 거세지면서 TSMC는 그 중심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보고 있으며, AI가 이끄는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지난 10년간 TSMC의 가장 중요한 고객은 단연 애플이었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애플의 막대한 주문과 끊임없는 기술 혁신 요구는 TSMC가 생산 능력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경쟁사인 삼성전자 등을 상대로 초미세 공정 기술 격차를 벌리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제 TSMC는 특정 고객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사업 구조를 갖췄다. 애플의 주문이 줄어들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매출 충격의 위험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엔비디아, 애플과 '투톱'으로 부상
그 중심에는 AI 칩 시장의 절대 강자 엔비디아가 있다. 불과 2년 전인 2023년 5%에 머물렀던 엔비디아의 비중은 AI 시대의 개막과 함께 폭발적으로 늘어나 2025년 20%까지 치솟았다. 이로써 TSMC의 '터줏대감'이었던 애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 됐고, 두 기업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을 합치면 전체의 약 40%에 이른다.
이 외에도 AMD, 퀄컴, 브로드컴, 인텔, 아마존의 아나푸르나 랩스, 대만의 미디어텍 등 굴지의 기업들이 TSMC의 핵심 고객사 목록을 채우고 있다. 이들 기업까지 포함한 상위 고객사들의 매출이 2025년 TSMC 전체 달러 매출의 70%를 웃돌면서, TSMC의 고객 기반이 미국 중심의 첨단 기술 기업들로 완벽하게 재편됐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칼날, 中 비중 8% 추락
미국의 제재가 본격화하기 이전, 화웨이의 반도체 설계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은 TSMC 매출의 10% 이상을 차지하며 애플에 이어 2위 고객사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하지만 미국의 수출 금지 조치는 TSMC의 사업 지형도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워싱턴이 반도체 장비와 AI 기술에 대한 규제를 단계적으로 강화하면서, 2025년 3분기 기준 TSMC의 전체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8%까지 급락했다. 다만 최근 엔비디아가 미국의 대중국 수출 통제 완화 조치에 따라 중국 시장 수출용 AI 칩 'H20'을 TSMC에 30만 개 이상 주문하며 시장 공략을 재개하는 움직임도 있어, 앞으로 중국 관련 매출 비중의 변화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중국 고객사 중에서는 비트메인이 유일하게 상위 10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그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미국의 무역 규제 압박 속에서 비트메인의 매출 비중은 과거 4% 수준에서 현재 약 2%로 쪼그라들었다.
유니SOC(Unisoc), 스마트센스(SmartSens), 옴니비전(OmniVision) 등 다른 중국의 반도체 설계 기업들은 AI와 무관한 저사양 칩에 한해 소규모 주문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반도체 자급자족 정책 기조와 맞물려 이들의 주문량은 수년째 제자리걸음이며, 각 기업이 TSMC 매출에 기여하는 비중은 1% 미만에 불과하다. 업계에서는 2026년 이후 AI 관련 GPU 및 주문형 반도체(ASIC) 수요가 더욱 늘고, 아마존, 구글 등 대형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업체(CSP)들이 자체 칩 설계에 나서면서 TSMC의 매출 구조가 또 한 번의 거대한 재편을 맞이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