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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반도체 대란] 삼성전자, 반도체 '5년 장기계약' 꺼냈다…AI 메모리 공급난 "출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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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반도체 대란] 삼성전자, 반도체 '5년 장기계약' 꺼냈다…AI 메모리 공급난 "출구가 없다"

분기·연간 거래 관행 깨고 3~5년 공급 검토…수급 불균형 구조화 첫 공식 인정
SK 최태원 "4~5년 더 간다"…HBM 쏠림에 일반 메모리 부족 갈수록 심화
노트북·자동차·데이터센터까지 가격 압박…"반도체 공급망 패권 재편 시작됐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부족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다년 계약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부족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다년 계약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이미지=제미나이3
스마트폰과 노트북에 들어가는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오른다면, 그 청구서는 결국 소비자의 몫이다. 인공지능(AI)이 불을 댕긴 반도체 공급 대란이 단기적 수급 불균형을 넘어 산업 구조 자체를 흔드는 '구조적 공급난'으로 굳어지고 있다. 삼성전자가 수십 년간 유지해 온 단기 거래 방식을 버리고 최장 5년짜리 공급 계약이라는 이례적 카드를 꺼낸 것은, 시장이 이미 그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신호로 읽힌다.
삼성 그룹주 동반 상승… 삼성생명 13%↑. 도표=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삼성 그룹주 동반 상승… 삼성생명 13%↑. 도표=글로벌이코노믹


삼성전자, 반도체 업계 '관행의 벽' 허문다


블룸버그통신은 18(한국 시각)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부족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다년 계약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공동대표이사)은 같은 날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에게 직접 이 방침을 밝혔다. 전 부회장은 "현재 분기 또는 연간 단위로 이뤄지는 메모리 반도체 공급 계약을 3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2026년에도 AI용 메모리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발표 직후 시장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유가증권시장(KOSPI)에서 삼성전자 주가는 장중 한때 6.5% 급등하며 205500원까지 치솟았다. 계열사 주가도 동반 급등했다. 삼성물산은 8.9%, 삼성생명은 13%가량 오르며 그룹 전체에 대한 시장의 기대감을 반영했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3~5년짜리 공급 계약은 사실상 전례 없는 시도다. 업계 관계자는 "단기 계약은 제조사가 시황에 따라 가격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면서 "삼성이 이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검토에 나섰다는 것은 공급난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4~5년은 더 간다"SK·마이크론도 장기전 예고


이 같은 진단은 삼성만의 것이 아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이번 주 "반도체 제조 공정의 구조적 제약으로 인해 글로벌 공급 부족이 앞으로 4~5년은 더 이어질 것"이라며 가격 안정을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 메모리 시장은 현재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세 곳이 사실상 과점하고 있다. 이들 3사는 최근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 탑재되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노트북·스마트폰·자동차용 일반 메모리 생산 여력은 오히려 축소하는 이른바 '풍선 효과'를 낳고 있다.

AI가 먹어치우는 HBM 물량이 늘어날수록, 일상에서 쓰이는 D램과 낸드플래시의 공급은 줄어드는 구조다.

한국 수출·소비자 물가에 '이중 파장'


이 공급난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파장은 이중적이다.

수출 측면에서는 단기적 호재로 읽힐 수 있다.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는 최대 품목이다. 메모리 가격 상승이 이어지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은 개선되고, 무역수지 흑자 폭도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내수와 소비자 물가 측면에서는 역풍이 불 수 있다.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국내 IT 제조사들의 제품 원가도 올라가고, 이는 결국 스마트폰·노트북·자동차 가격 인상으로 이어진다.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기업들 역시 서버 투자 비용 부담이 커진다.

증권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장기계약 체계가 현실화될 경우, 반도체 제조사는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확보하는 반면 메모리 가격의 하방 경직성이 강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는 "과거엔 경기 침체기에 메모리 가격이 급락해 소비자 가격도 내려가는 조정 기제가 있었는데, 장기계약이 자리 잡으면 이 완충 기능이 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급망 패권 전쟁, 기술 싸움에서 '계약 싸움'으로


AI가 촉발한 반도체 대란은 이제 단순한 기술 경쟁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 누가 더 빨리 선단 공정을 확보하느냐의 경쟁에서, 누가 더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고 장기 파트너십을 선점하느냐의 경쟁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던진 '5년 장기계약' 카드는 시장에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던진다. 첫째, 공급난은 일시적 충격이 아니라 구조적 현상이라는 것. 둘째, 이 구조적 현상에서 주도권을 쥐는 쪽이 향후 반도체 가치사슬의 수익을 독점할 것이라는 점이다.

인공지능이 가속할수록 데이터는 폭증하고, 데이터를 처리할 메모리는 더 부족해진다. 삼성전자의 이번 결정이 단순한 계약 방식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한국 반도체 산업이 '가격 수용자'에서 '가격 설정자'로 올라서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