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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을 통해 조건 없이 베푸는 부모님 사랑과 추억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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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을 통해 조건 없이 베푸는 부모님 사랑과 추억 묘사

[전혜정의 미술이 있는 삶(56)] 그리움의 시로 부치는 편지

외로운 듯 하나만 매달렸지만

사랑과 풍요로 가득참을 의미

홍시의 그리움


님의 품에서 감들은
한알 한알이 시어들을 머금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하나
볼연지처럼 수줍게 얼굴만 붉히고 있네

순백의 하얀 세계는
영원으로 연결되는 길목이어서
어제의 그리움과
내일 다가올 그리움도 담고

하늘처럼 맑고 빛처럼 투명함이
형상을 입고 나온 듯하여
손을 내밀어 만져보고 싶고
그 빛깔에 입 맞추고 싶네

- 김한숙의 그림 앞에서 시인 이필립 -

김한숙 작 그리움-희망, 116.8x80.3cm, Oil on canvas이미지 확대보기
김한숙 작 그리움-희망, 116.8x80.3cm, Oil on canvas
우리에게는 모두 우리를 추억으로 이끄는 음식들이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마들린이 그랬고,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는 오니기리가 그랬다. 작가 김한숙에게는 감이 그렇다. 김한숙의 감은 어린 시절부터 익숙히 보아온 존재이자 추억으로 가는 관문이고 부모님의 사랑이다. 작가 생활 내내 줄곧 감을 그려온 김한숙에게 감은 우리가 아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감이라는 소재는 보기에 아름답고 이해하기에 쉬우며, 우리의 정서를 잘 대변해준다. 또한 감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감은 풍요와 번창, 다산 그리고 문·무·충·효·절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 당나라의 단성식(段成式)이란 사람은 감나무를 5가지 덕목을 갖춘 예절의 나무라했다. 잎이 넓어 붓글씨 공부를 할 수 있으니 문(文)에 기여함이 첫째 덕목이요, 나무재질이 단단하여 화살촉으로 쓸 수 있어 무(武)에 이바지함이 두 번째 덕목이며, 열매와 속이 똑같이 붉으니 충(忠)이 넘친 나무라고 하였다.

또한 홍시는 치아가 약한 노인도 쉬 먹을 수 있으니 효(孝)가 깃들어 있고 늦가을 찬 서리에도 굴하지 않고 매달려있으니 절개(節槪)가 있다고 칭송했다. 게다가 중국어로 감과 일이 발음이 비슷해서 회사나 기업에 일감이 늘어난다는 좋은 의미로도 해석하고 있다.

김한숙 작 그리움, 145.5x97.0cm, Oil on canvas이미지 확대보기
김한숙 작 그리움, 145.5x97.0cm, Oil on canvas
김한숙의 감은 늦가을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항상 보아오던 친숙한 존재이자, 부모님과 고향,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작가를 데려가는 추억의 매개물이다. 서양화를 전공하였으나 화면에 여유롭게 보이는 흰 배경은 동양화를 연상하게끔 하지만, 작가에게 배경의 흰색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도 없고 영원불멸한 부모님의 사랑이다. 이 흰색은 벅차오르듯 화면을 채운다. 김한숙의 작품은 배경의 흰색, 감의 붉은색, 잎의 초록색, 가지의 갈색 등 몇 가지 색의 요소를 가지고 우리의 정서를 고스란히 녹여낸다. 어느 동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감나무와 감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내 집 앞 골목의 모습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다. 가지에 몇 개 달린 그림 속 감은 악보 위 음표처럼 조용하면서도 경쾌한 음악을 울린다. 흰색과 붉은색, 붉은색과 초록색은 서로 보색을 이루며, 갈색과 노란빛은 그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준다. 가지 끝에 매달린 감을 보고 우리는 풍성한 가을과 이제 곧 다가올 겨울의 쓸쓸함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움이다.

김한숙 작 그리움, 73x73cm, Oil on canvas이미지 확대보기
김한숙 작 그리움, 73x73cm, Oil on canvas
김한숙 작 그리움- 쉼, 53x45.5cm, Oil on wood
김한숙 작 그리움- 쉼, 53x45.5cm, Oil on wood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을 먹으며 길고 긴 추억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마르셀이 베어 물은 마들렌은 더 이상 손 안의 작은 과자가 아니다. 마들렌의 존재는 점점 커져 과거로 가는 관문이 된다. 김한숙의 감도 작가에게는 어느새 그 존재가 점점 자라나서 작가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지나가 버린 우리들의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수고다. 우리가 아무리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도 되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는 우리의 의식이 닿지 않는 아주 먼 곳, 우리가 전혀 의심해 볼 수도 없는 물질적 대상 안에 숨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죽기 전에 이 대상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순전히 우연에 달려 있다”고 쓰고 있다. 기억은 사물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감은 김한숙에게 과거로 가는 기억의 관문이자 열쇠이고 부모님의 사랑인 흰 배경에 드리워진 쉼표다. 우리는 감을 먹지 않고도 나무에 매달려 있는 감의 존재에서 휴식과 사랑, 과거의 추억을 느낀다.

김한숙 작 그리움-까치밥, 162.1x112.1cm, Oil on canvas이미지 확대보기
김한숙 작 그리움-까치밥, 162.1x112.1cm, Oil on canvas
김한숙 작 그리움-희망, 116.8x91cm, Oil on canvas이미지 확대보기
김한숙 작 그리움-희망, 116.8x91cm, Oil on canvas
김한숙 작 그리움-희망, 90.9x65.1cm, Oil on canvas이미지 확대보기
김한숙 작 그리움-희망, 90.9x65.1cm, Oil on canvas
나무 끝에 외롭게 하나 매달린 감은 까치밥이다. 까치밥은 인간들이 인간 이외의 존재를 위해 남겨둔 나눔의 상징이자 배움의 상징이다. 수확의 모든 고됨을 뒤로 하고 새들을 위해 몇몇 감들을 남겨둔 것으로 가을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외로운 듯 하나만 매달린 감은 그래서 외로운 것이 아닌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림으로 시를 쓰고 싶다. 아련한 그리움의 시. 말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는 그 그리움을….” 작가가 적고 있듯이 김한숙의 그림은 작가가 쓰는 시이고, 우리에게 부치는 그리움의 편지다. 우리는 그 시 속에서 감의 달큰함을, 가을 햇살의 따사로움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리운 과거로 돌아간다. 어린 시절의 사랑과 추억이 있는 곳, 나누고 베푸는 풍요로움이 있는 곳. 과거를 향한 우리의 그리움은 어느새 발갛게 익어가고 있다.

김한숙 작 그리움-희망, 162x130cm, Oil on canvas이미지 확대보기
김한숙 작 그리움-희망, 162x130cm, Oil on canvas


● 작가 김한숙은 누구?

김한숙은 대구예술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극사실적으로 감을 묘사하여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23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한국과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 다수의 아트페어에 참가했다. 감을 통하여 서양화에 동양적 여백을 끌어들여 감상자들로 하여금 마음의 여유를 주는 작품을 그리고 있으며, 정물화의 사실적 재현보다는 감상적인 표현에 중점을 두어 작품 제작에 매진하고 있다.

● 필자 전혜정은 누구?

미술비평가, 독립 큐레이터. 예술학과 미술비평을 공부했다. 순수미술은 물론, 사진, 디자인, 만화, 공예 등 시각예술 전반의 다양한 전시와 비평 작업, 강의를 통해 예술의 감상과 소통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창작자와 감상자, 예술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있다. <아트씨드프로젝트(ART Seed Project): 시각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국민대 대학원 등에서 전시기획, 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고, 매일경제 TV <아름다운TV갤러리>에 미술평론가로 출연중이다.

전혜정 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