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은행의 뿌리를 찾아서④] 서민의, 서민에 의한, 서민을 위한 은행, KB국민은행

공유
0

[은행의 뿌리를 찾아서④] 서민의, 서민에 의한, 서민을 위한 은행, KB국민은행

서민 금융편의를 위해 탄생한 은행…만성적 빈곤을 겪던 서민의 이웃으로
서민의 저축증강 목표…영역 확장으로 '국민의 은행' 도약
'내집마련’의 꿈을 위한 주택은행, 주택난 해소 일등 공신
외환위기에 하나된 국민은행, 리딩뱅크로 대한민국 금융을 선도

KB국민은행 여의도 본점 [사진=KB국민은행]이미지 확대보기
KB국민은행 여의도 본점 [사진=KB국민은행]
“고객보다 더 먼저인 가치는 없다. 디지털 시대에도 고객의 자산을 지켜야 하는 ‘금융인의 사명’은 절대 변할 수 없다” 허인 KB국민은행장이 과거 창립 기념식에서 던진 화두다. 이는 ‘서민의 은행’을 자부해온 KB국민은행의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KB국민은행의 뿌리는 1960년대 출범한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다. 두 은행은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서민들에게 금융 혜택을 주고 내 집 마련을 돕기 위해 존재해 왔다. 단연, 서민들의 수신을 기반으로 운영된 점에서 타 시중은행과 구별됐다. 말 그대로 서민을 위한, 서민에 의한 은행이 지향 점이었다. 현재 두 은행은 'KB국민은행'이란 이름아래 통합해 대한민국 금융 시장을 이끄는 거대 은행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진정한 서민의 은행으로써 새로운 60년을 다시 준비하고 있다.
◆서민 금융 편의를 위해 탄생한 은행…만성 빈곤을 겪던 서민의 이웃으로


우리나라 서민 금융의 뿌리는 대한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5년 등장한 무진사는 오늘날 상호 금융과 유사한 형태다. 무진사는 회원들로부터 매월 일정액의 돈을 거둬들이고, 이를 일정한 이자를 받고 회원에게 급부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무진사는 고리대 보다는 이자가 낮았지만 은행보다 높았다. 대출금 회수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켜 금융 경색을 유발하기도 했다. 1935년에는 무진사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로 병합되면서 침탈의 수단도 됐다. 6·25 전쟁 이후에는 대규모 인구 변동 등으로 대부분이 파산한다.

1963년 국민은행 출범 [사진=KB국민은행]
1963년 국민은행 출범 [사진=KB국민은행]

1960년대는 휴전 이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속에서 국민들이 만성적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다. 정부는 1962년 ‘국민은행법’을 제정하고 이듬해인 1963년, 서민금융 전담 국책은행인 '국민은행'을 설립한다. 법정 자본금 5억 원, 임직원 1312명, 전국 57개 지점으로 시작을 알린 국민은행은, 동일인에 대한 여신 한도 제한을 원칙으로 했다. 보다 많은 서민들에게 금융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자는 취지다. 한정된 자산이 특정 기업이나 개인에 집중되지 않도록 하려는 취지였다. 국민은행은 상호 부금을 중심으로 운영했다. 이는 금융 기관과 가입자가 일정한 기간을 정해 부금을 납입시 중도나 만기가 도래한 경우, 일정 금액을 대출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형태의 저축이다. 이후 금융 지원 대상도 소규모 기업으로 까지 확대됐지만, 서민 금융의 본분에도 충실했다.

◆서민의 저축 증강 목표…영역 확장으로 '국민의 은행' 도약


1976년 국민은행 목돈마련 저축 시행 [사진=KB국민은행]
1976년 국민은행 목돈마련 저축 시행 [사진=KB국민은행]

국민은행은 서민의 저축 증강을 주요 목표로, 각종 예금 출시에 적극적이었다. 1970년에는 당시 호주에서 실시하던 학교 은행제도를 국내에 처음 도입해 1971년에는 어린이 예금을, 1975년에는 봉급생활자 신용대출제도와 학자금대출제도를 실시했다.
1976년에는 일종의 사회복지제도인 근로자재산형성저축제도를 실시했으며, 1982년에는 금융사 최초의 종합금융서비스라고 할 수 있는 국민종합통장을 출시하는 등 서민 저축 증대에 앞 장 섰다. 그 결과 국민은행은 1979년 9월 국내 금융사 최초로 총 수신 1조 원에 도달한다. 이후 1982년 4월에는 2조 원, 1990년 8월에는 10조 원을 돌파했다. 이를 통해 1983년을 기점으로 10년 연속 최우수저축기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9년 신용카드를 통한 신용 사회의 초석을 다진 것도 국민은행이다. 1983년에는 통장 하나로 자동 입출금이 가능하고 거래 실적에 따라 최대 3000만 원까지 신용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국민상거래통장'도 출시했다.

업무 영역 확장에도 충실했다. 국민은행은 1984년에는 리스사를, 1986년에는 기술금융사를 설립했다. 1987년에는 신용카드업무를 분리해 신용카드사를 설립하는 등 자회사를 통해 업무 영역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1994년 9월에는 국민은행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 시키기도 했다.

1987년 국민은행 국민신용카드 설립 [사진=KB국민은행]
1987년 국민은행 국민신용카드 설립 [사진=KB국민은행]

이후 1995년 1월. ‘국민은행법’ 폐지 이후 국민은행은 민영화됐다. 특수은행으로서 가졌던 제약이 사라진 것이다. 이를 통해 국민은행은 ‘서민은행’을 넘어 진정한 의미의 ‘국민은행’으로 도약을 꿈꾸기 시작한다.

◆‘내 집 마련’ 꿈을 위한 주택은행…주택난 해소 일등 공신

한편 국민은행의 또 다른 뿌리는 1967년 설립된 주택은행이다. 주택은행의 출범 당시 명칭은 ‘한국주택금고’였다. 하지만 2년 뒤 ‘한국주택은행법’의 공포로 명칭이 한국주택은행으로 바뀐다.

1984년 주택은행 본점 이전 [사진=KB국민은행]
1984년 주택은행 본점 이전 [사진=KB국민은행]

주택은행의 설립목적은 주택자금을 공급해 국민의 주거 생활 안정과 주거 수준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른바 서민의 ‘내 집 마련’을 위한 은행이 출발한 것이다. 이는 1950년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국내의 많은 주택들이 파손된 것과, 급격한 산업화로 도시 지역의 인구 밀집 현상이 가속화된 것에서 비롯됐다. 주택 난 해소를 위해 정부는 '주택자금운용법'을 제정했지만 운용 자금이 수요에도 못 미치는 현상이 나타났다.

주택은행은 예금 외에도 독점적으로 주택부금이나 주택청약예금을 취급해 자금을 조달해 왔다. 국민은행과 유사한 점이 많았던 주택은행은 차츰 주택 채권을 통한 초기 자금 조달 방식에서 벗어나 순수 민간 자금으로 주택 건설을 지원할 수 있었다.

특히 1980년 7월 개시한 중장기 부금은 만성적인 주택 난 해소의 일등 공신이었다. 1970년대는 주택 공급량이 턱없이 부족해 주택을 사기보다 '짓는 것'이 당연했던 시기다. 서민들은 높은 대출 문턱에 만성적인 주택 난 까지 이중고에 시달렸다. 이 시기 비좁은 셋방에서 온 가족이 사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이같은 주택난이 금융을 통해서 해소된 것이다.

1989년 주택은행 예수금 5조원 돌파 [사진=KB국민은행]
1989년 주택은행 예수금 5조원 돌파 [사진=KB국민은행]

또한 주택은행은 1969년 9월 ‘주택복권’ 사업을 통해 취약 계층의 주택난 극복에 나서기도 했다. 주택복권의 목적은 무주택 군·경 유가족, 국가유공자, 파월장병의 주택기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당시 액면가는 100원에 1등 당첨금은 300만 원이었다. 무려 37년을 이어간 국민적 히트 상품이 되었다.

1990년대는 주택은행의 전성기였다. 1988년 외국환업무를, 1989년에는 신탁업무를 개시했다. 1991년 주은리스를 시작으로 주은투신운용, 주은영동상호신용금고 등을 합병해 몸집도 키워 나갔다.

1996년 당시 주택은행은 무디스사의 신용평가에서 A1을 획득했으며, 11월 총 수신은 25조 원에 달했다. 당시 총자산은 28조5337억 원에, 직원은 관리 사무직만 1만 명이 넘는 거대 은행이 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주택은행을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외환위기에 하나된 국민은행, 리딩뱅크로 대한민국 금융을 선도하다


1998년 국민은행 한국 장기신용은행 합병 [사진=KB국민은행]
1998년 국민은행 한국 장기신용은행 합병 [사진=KB국민은행]

IMF 외환위기는 국민, 주택 양 은행에 새로운 분기점이 됐다. 은행권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1998년 두 은행은 각각 장기신용은행과 대동은행, 동남은행을 합병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두 은행의 합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두 은행 모두 소매 금융에 치중해 있어, 합병하는 경우 하나의 거대 은행이 은행권 소매 금융을 독차지 할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그럼에도 외한위기와 대우사태를 겪으며 부실리스크에 시달리던 금융권을 선도할 ‘리딩뱅크’가 필요하다는 것이 당국과 시장의 판단이었다.

2001년 통합 국민은행 출범 [사진=KB국민은행]
2001년 통합 국민은행 출범 [사진=KB국민은행]

그 결과 양 은행은 2001년 12월, 국민은행의 이름으로 뭉쳤다. 총자산 203조 원, 국내 소매금융시장의 30% 가량을 점유한 초거대 은행의 등장이었다.

이후 2002년 국민은행은 KB국민은행으로 명칭을 바꾸고 총대출금 100조 원도 돌파했다. 이듬해 2003년에는 국민신용카드와 합병을 완료했으며, 정부의 지분 매각으로 완전한 민영화에도 성공했다. 또한 2004년에는 한일생명(現 KB생명보험)을, 2008년에는 한누리투자증권(現 KB투자증권)을 인수해 몸집마저 불렸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9월 KB금융지주를 출범시켰다. KB국민은행은 지주사 체제아래에 들어가 은행권의 ‘리딩뱅크’로 꾸준히 자리를 지켜왔다.

2008년 지주 공식 출범 [사진=KB국민은행]이미지 확대보기
2008년 지주 공식 출범 [사진=KB국민은행]

지난해 말 기준 KB국민은행의 예수금은 300조565억 원, 대출금은 294조6504억 원이다. 시장점유율은 각각 20.8%, 19.7%로 시중은행 중 가장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KB국민은행은 지난해 기준 지주의 순이익 중 66%를 담당하고 있다. 이는 내수 금융시장에서 높은 시장 점유율을 보인 결과로, 타 은행 대비 내수 집중도가 높다는 것을 뜻한다. 서민금융이란 뿌리를 항상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상에서도 KB국민은행의 ‘국민 챙기기’는 변함없다. 특히 디지털 전환이 화두로 오르기 훨씬 전부터 KB국민은행은 새로운 국민들과의 접점을 늘려왔다.

2015년 국민은행 'KB스타뱅킹' 고객 1000만 고객 돌파 [사진=KB국민은행]이미지 확대보기
2015년 국민은행 'KB스타뱅킹' 고객 1000만 고객 돌파 [사진=KB국민은행]

그 결과 2015년 4월 국내 은행권에 고무적인 일이 발생한다. KB국민은행의 스마트폰 뱅킹 서비스 ‘KB스타뱅킹’이 국내 최초로 이용고객 수 1000만 명을 돌파한 것.

이는 윤종규 6대 KB은행장(現 KB금융지주 회장) 취임 1년만의 일이다. 또한 디지털뱅킹 서비스를 미래성장동력으로 인식한 발 빠른 투자의 결과물이다. 6년 후인 현재 금융권의 화두가 디지털뱅킹임을 감안하면 이는 선도적인 행보다.

2021년 리브넥스트 이미지 [사진=KB국민은행]이미지 확대보기
2021년 리브넥스트 이미지 [사진=KB국민은행]

현재 KB국민은행의 목표는 금융과 비금융 영역을 아우르는 종합 서비스를 KB의 플랫폼 생태계를 통해서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디지털뱅킹 앱 ‘KB스타뱅킹’을 새롭게 재구축했으며, 젊은 세대를 겨냥한 금융플랫폼 ‘리브 넥스트(Liiv Next)’도 출시했다.

허인 은행장은 “이제는 금융 서비스의 디지털화를 넘어, 고객의 모든 일상을 함께하는 ‘생활 속 금융’이 금융의 미래상이다"며 “고객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금융·비금융 영역을 아우르는 종합 서비스, 그것을 KB의 플랫폼 생태계를 통해 제공하는 것이 KB국민은행의 목표다”고 강조했다.


신민호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sho634@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