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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10억' 돌파한 싱가포르 공공주택…90% 자가보유 신화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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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10억' 돌파한 싱가포르 공공주택…90% 자가보유 신화 흔들린다

'도시계획 부친' 류타이커 타계와 함께 직면한 60년 모델의 위기
99년 지나면 가치 '0'…한국형 토지임대부 주택에 던지는 '자산 소멸' 경고장
전 세계 주거 정책의 교과서로 불리는 싱가포르의 공공주택 모델이 가파른 가격 폭등과 '유통기한' 만료라는 복합 위기에 직면했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전 세계 주거 정책의 교과서로 불리는 싱가포르의 공공주택 모델이 가파른 가격 폭등과 '유통기한' 만료라는 복합 위기에 직면했다. 이미지=제미나이3
전 세계 주거 정책의 교과서로 불리는 싱가포르의 공공주택 모델이 가파른 가격 폭등과 '유통기한' 만료라는 복합 위기에 직면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31(현지시각) 보도에서 싱가포르 현대 건축의 기틀을 닦은 류타이커(Liu Thai Ker) 전 주택개발청(HDB) 수석 건축가의 타계 소식을 전하며, 그가 설계한 공공주택 시스템이 60년 만에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고 분석했다. 류 전 수석 건축가는 생전 "공공주택이 주거 안정을 넘어 비즈니스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며 주택의 과도한 자산화를 경계해 왔다.

코로나가 쏘아 올린 집값 폭등…'로또'가 된 재판매 시장


싱가포르 시민 4명 중 3(80%)은 정부 기관인 주택개발청(HDB)이 공급한 아파트에 산다. 정부가 땅을 소유하고 건물만 분양해 가격을 낮춘 덕분에 자가 점유율은 90%를 넘는다. 하지만 최근 이 견고한 시스템에 균열이 생겼다. 코로나19 대유행 여파로 건설이 늦어지면서 새 아파트 입주 대기 시간이 기존 3년에서 최대 6년으로 늘어난 탓이다.

집을 구하지 못한 이들이 기존 아파트를 사고파는 '재판매 시장'으로 몰리면서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FT 분석 결과, 재판매 시장에서 100만 싱가포르 달러(75만 달러·한화 약 10억 원, 21일 환율 기준)를 넘긴 공공주택은 △202082가구에서 △20241035가구 △지난해 1594가구로 5년 사이 20배 가까이 급증했다.

'전통 가족'만 우대하는 추첨제…변화한 사회상에 '불공정' 논란


HDB 아파트는 주로 기혼 부부나 35세 이상 미혼자에게 우선권을 주는 추첨제로 배정한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혼인율이 19941000명당 57건에서 202442건으로 떨어지면서 1인 가구나 젊은 층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여기에 인종별 거주 비율을 강제로 맞추는 '민족 통합 정책'이 재판매 시장에서 특정 인종 간의 거래만 허용하는 등 거래를 제약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싱가포르 국립대 크리스토퍼 지 부소장은 "싱가포르인들의 가계 자산이 지나치게 부동산에 쏠려 있다"고 꼬집었다.

99년 임대 시한폭탄…'내 집'이 사라지는 날의 공포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99년이라는 장기 임대 기한이다. HDB 아파트는 99년이 지나면 정부에 소유권을 반납해야 한다. 초기 공급된 아파트들이 입주 70년 차에 접어들면서, 남은 임대 기간이 줄어들수록 집값이 하락하는 '자산 가치 소멸' 문제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류 전 수석 건축가는 2022년 인터뷰에서 "임대 기간이 끝나면 주택을 정부에 돌려줘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퇴직금의 상당 부분을 주택에 쏟아부은 시민들에게 주택 가치 하락은 노후 파산과 직결되는 예민한 사안이다. 싱가포르 경영대학교 추아벵후앗명예교수는 "임대 기한 만료 문제는 향후 거대한 정치적 쟁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싱가포르 정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오는 2027년까지 5만 가구 이상의 신규 주택을 공급하고 중하위 소득층에 대한 보조금을 확대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단순한 물량 공세를 넘어 '주택=투자 자산'이라는 인식의 전환과 임대 기한 만료에 따른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국형 '반값 아파트'가 가야 할 길


최근 한국에서도 서울시(SH)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싱가포르 모델을 본떠 '토지임대부 분양주택' 공급을 늘리고 있다.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주택을 '''건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토지임대부 주택이란 땅은 정부(SH·LH)가 계속 가지고, 시민은 '건물 값'만 내고 입주하는 방식이다. 땅값을 안 내니 주변 시세보다 반값 이하로 저렴해 '반값 아파트'로 불린다. 대신 매달 토지 임대료를 정부에 내야 하며, 싱가포르처럼 보통 40~80년의 거주 기간(임대 기간)이 정해져 있다.

현재 SH공사가 고덕강일, 마곡 지구 등에서 이 방식으로 이미 사전예약을 받으며 호응을 얻고 있다. LH 역시 단순히 땅을 팔아 수익을 내던 방식에서 벗어나, 싱가포르처럼 공공이 땅을 보유하며 주택 공급을 주도하는 모델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현재 고민은 한국에 중요한 숙제를 던진다. 첫째, '자산 소멸'의 공포다. 우리나라는 집을 '재산 1'로 여기는데, 40~80년 뒤에 건물을 나라에 돌려줘야 한다면 나중에 그 집을 팔 때 아무도 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재건축 권한이다. 내 건물이라도 땅이 나라 소유면 내 마음대로 허물고 새로 지을 수 없다. 임대 기간이 끝났을 때 정부가 보상을 해줄지, 아니면 그냥 나가라고 할지에 대한 '정교한 설계도'가 아직 한국에는 부족하다.

싱가포르 국립대 리콴유 공공정책대학원 전문가들은 "공공주택이 주거 복지가 아닌 자산 불평등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공급 확대와 동시에 기간 만료 이후의 소유권 문제를 지금부터 제도화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