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와 중년기가 불안하고 불안정한 이유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심리적 층(層)이 부딪치기 때문이다. 마치 지진(地震)이 지구 내부 암석권에 있는 판(板)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서로 충돌을 일으켜 생긴 급격한 지각변동의 충격이 지표면까지 전해져 지반을 진동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청소년기, 심리적으로 제일 갈등 심하고 신체적 큰 변화
청소년기가 심리적으로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것은 '어린이'층과 '젊은이'층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청소년기는 더 이상 어린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른' 즉 젊은이도 아닌 어정쩡한 시기이기 때문에 방황이 심한 것이다. 청소년기의 갈등과 방황은 한 마디로 어린이의 탈을 벗고 어른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변신의 부산물이다.
중년기가 또다시 갈등이 많은 불안정한 시기인 것은 '젊은이'와 '늙은이' 두 층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중년기는 더 이상 '젊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늙은 것'도 아닌 어중간한 시기이기이다. 심리적으로는 아직 젊은이와 같은 느낌이지만 몸은 이미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라는 신호를 여기저기서 보내기 시작한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인정하면 정말 늙은이가 될 것 같은 불안 때문에 애써 젊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무리하다가 오히려 병을 얻기도 한다.
중년이 되면 이제 청년기의 목표와는 다른 목표가 새로 생긴다. 더 이상 젊지 않고 앞으로 더 이상 활발하게 행동할 수 없는 노년기가 기다리고 있다면 젊은 시절처럼 오로지 사회적 성공과 출세 위주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또는 전업주부인 경우에는, 자녀들이 더 이상 어머니의 손길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시기를 지나 독립하는 시기가 된다. 소위 '빈 둥지'를 경험하는 시기가 된다. 이제는 가정을 이끌어가고 자녀를 양육하는 중요한 책무에서 점차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중년기에는 지금까지의 삶을 평가하고 진정 자신의 삶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제는 젊음의 절정이 끝나고 죽음이 기다리는 노년기를 향해 원치 않는 걸음을 내딛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또다시 제2의 '사춘기'가 되는 이유이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해오던 익숙한 역할을 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익숙하지만 청년기에 적합했던 삶의 양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건설해야 하는 괴로운 시기를 보내야 한다. 삶에서 또 한 번의 큰 지진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가정과 사회에 큰 아픔을 주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어차피 지진으로 기존의 질서는 파괴되고 슬픔과 혼란 속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청소년 시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방황하는 시기가 꼭 필요하듯이 중년기에도 진정한 '자신'을 알기 위해 방황하는 시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정체감을 형성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정체성의 형성은 그동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살기 바쁘고, 또 자녀를 양육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마음의 헛간에 정리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두었던 생활의 단편들 속에서 앞으로의 삶을 즐겁고 보람 있게 살기위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대체로 무의식적이다. 의식적으로 노력하거나 탐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중년기에 진정한 '자기'를 찾아나가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청소년기의 정체성 확립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청소년기에는 '심리사회적 유예기간(psychoSocial moratorium)'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청소년들은 이 기간 동안 그들의 개인적인 힘과 능력을 기르고 지역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하여 새로운 역할이나 가치 혹은 신념체계에 대해 반복적으로 실험한다. 다른 말로 하면, 유예기간이란 개인의 정체감을 효과적으로 확립하기 위하여 외부적 요구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기간을 의미한다. 사회는 청소년들의 방황을 인정하고 기다려준다.
'심리사회적 유예기간'을 시중에선 '갭 이어(Gap year)'라고 부른다. '갭 이어'는 학업이나 일을 잠시 멈추고 봉사, 교육, 인턴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자기주도적인 진로탐색의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갭이어 시범사업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20대 청년 일부를 대상으로 단편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데 그쳤다. 이제는 갭이어가 단순히 청년층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중년들에게도 확대되어야 한다. 중년에도 방황해야 한다.
중년기는 지금까지 삶 평가하고 찾으려 부단히 노력
급격한 고령사회의 등장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충분히 준비하기 전에 너무 빨리 닥친 변화이기 때문이다. '백세시대'라고 불리는 현대에서는 중년기의 중요성이 청소년기 못지않게 강조되어야 한다. 중년기 또한 청소년기 못지않게 삶의 큰 변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수명이 길지 않았을 때는 청소년기에만 자기정체감을 확립하는 과제가 있었다. 이 정체감에 근거해 성인기를 보내면 곧 노년기로 들어가기 때문에 중년기는 단순히 젊은이 시절을 정리하고 닦아오는 노년기를 맞을 준비를 하면 되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제2경력(second career)'도 부족해 '제3경력(third career)'도 준비해야 할 정도로 수명이 길어지고 노년기를 맞이하는 시기가 길어졌다.
현대는 앞 세대와는 전혀 다른 삶의 여정을 간다. 전에는 청소년기에 자신에게 맞는 정체성을 확립하면 되는 ‘단일 정체성’의 삶을 사는 것이 권장되었다. 하지만 현대는 청소년기에 형성한 정체성으로 제2, 제3의 경력을 효과적으고 살아갈 수 없다. 이제는 ‘복합적 정체성(multiple identity)을 가지고 각각의 시기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중년기에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하면 길어진 인생의 후반기에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큰 짐이 되는 삶을 살게 된다.
보통 '아줌마'라고 불리는 중년의 기혼 여성들은 그 생활력이 강한 것과 억센 것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아줌마들도 한 때는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몸매에 날아가는 새만 보아도 깔깔대며 웃었고,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만 봐서 벤치에 앉아 시를 끄적이던 감수성 예민한 소녀들이었다. 그들도 나름 '꿈 많은 소녀'였다.
중년기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꿈'을 찾아 실현하는 시기이다. 이제는 사회적 성공이나 자녀 양육의 책임에서 벗어나 진정 자신이 하고 싶었던 꿈을 찾아야 한다. 많은 존경을 받는 소설가 박완서님은 문학을 꿈꿨지만 한국전쟁과 결혼으로 그 꿈을 접었다. 하지만 나이 40세에 처음으로 장편소설 『나목』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그는 그 후 40여 년 동안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겨 존경받고 있다. 중년기는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장편을 쓰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제 인생 후반기를 두려운 마음으로 떠나는 중년에게도 방황을 허락해야 한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