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초점] 미국, '엔비디아 칩' 중국 밀수 조직 적발…中과는 '보안 백도어' 공방

글로벌이코노믹

[초점] 미국, '엔비디아 칩' 중국 밀수 조직 적발…中과는 '보안 백도어' 공방

미 상무부 수출 통제 비웃듯 H100 칩 제3국 우회해 중국 밀반입 시도
中 "칩에 원격 정지 기능" 의혹 제기…엔비디아 "보안 원칙 위배, 사실무근" 강력 반박
미국의 수출 통제를 받는 엔비디아의 최첨단 AI 칩(H100)을 중국으로 밀수하려던 조직이 적발된 가운데, 중국은 합법적으로 수출된 칩에 대해 '보안 백도어' 의혹을 제기하며 미·중 기술 갈등이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미국의 수출 통제를 받는 엔비디아의 최첨단 AI 칩(H100)을 중국으로 밀수하려던 조직이 적발된 가운데, 중국은 합법적으로 수출된 칩에 대해 '보안 백도어' 의혹을 제기하며 미·중 기술 갈등이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를 뚫고 최첨단 인공지능(AI) 칩을 불법으로 중국에 넘기려던 중국인들이 미국 현지에서 붙잡혔다.

지난 5일(현지시각) 로이터통신, CNBC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 법무부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중국 국적의 촨겅(28)과 스웨이양(28)을 수출 통제 품목 불법 선적 등의 혐의로 체포해 기소했다. 법무부 진술서를 보면 이들은 2022년 10월부터 2025년 7월까지 약 3년 동안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민감한 기술과 반도체 칩을 허가 없이 중국으로 불법 수출한 혐의를 받는다.

이들이 불법 유통한 품목에는 엔비디아의 최첨단 AI 칩 'H100' GPU가 포함됐다. H100은 현재 AI 개발에 가장 널리 쓰이는 반도체로, 미국 상무부가 2022년부터 국가 안보를 이유로 중국의 접근을 엄격히 제한하는 수출 통제 대상 핵심 품목이다.

◇ 제3국 경유한 치밀한 밀수 수법


조사 결과 이들은 미국의 수출 통제가 시작된 직후 캘리포니아에 'ALX 솔루션스'라는 유령 회사를 세우고 범행을 치밀하게 계획했다. 법 집행 당국이 압수한 이들의 휴대전화에서는 미국 수출법을 피하려고 말레이시아를 거쳐 칩을 우회 배송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등 범행을 입증하는 통신 내용을 찾아냈다. 실제로 ALX 솔루션스는 2024년 12월 한 달 동안에만 20건이 넘는 화물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화물 운송업체로 보냈다. 법무부는 이들 국가가 중국으로의 불법 선적을 숨기려고 흔히 쓰는 환적지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들은 물품 대금을 정상적인 수출 대상 법인이 아닌 홍콩과 중국에 있는 회사들로부터 받으며 자금 흐름을 숨겨왔다.

이번 사건을 두고 엔비디아는 CNBC를 통해 "밀수는 성공할 수 없는 일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일축했다. 엔비디아는 "우리는 모든 판매가 미국의 수출 통제 규정을 지키도록 돕는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업체) 같은 공신력 있는 협력사에만 제품을 공급한다"며 "우회한 제품은 어떤 서비스, 지원, 업데이트도 받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첨단 반도체 밀수는 미국 정부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지난달 파이낸셜 타임스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 대한 수출 통제를 강화한 뒤에도 최소 10억 달러(약 1조3896억 원)어치의 엔비디아 칩이 중국으로 밀수됐다고 보도했다. 그때도 엔비디아는 "밀수한 칩으로 데이터센터를 짓는 것은 결국 손해 보는 장사"라며 "인증하지 않은 제품은 절대 지원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 합법적 수출품엔 '백도어' 공방


한편, 합법적으로 중국에 공급하는 AI 칩을 둘러싼 미중 갈등도 새롭게 커지고 있다. 엔비디아는 지난 5일 중국 시장용 AI 칩에 원격으로 기능을 멈추게 하는 '킬 스위치'나 '백도어'를 심었다는 중국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엔비디아의 데이비드 리버 최고 보안 책임자(CSO)는 공식 블로그를 통해 "엔비디아 GPU에는 킬 스위치와 백도어가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번 발표는 지난주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CAC)이 중국 시장용 칩 'H20'의 보안 취약점을 문제 삼으며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한 뒤에 나왔다. 중국 규제 당국은 특히 '백도어' 위험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고 뉴욕 타임스가 보도했다.

이번 공방은 AI 칩을 둘러싼 지정학 갈등 속에서 엔비디아가 처한 복잡한 현실을 드러낸다. 미국 의회에서는 수출 통제 대상 AI 칩에 위치 추적 시스템 장착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발의되는 등 중국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반면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엔비디아 칩이 중국 개발자들 사이에서까지 국제 표준이 되는 것이 미국에 더 이롭다"고 주장해왔다.

H20 칩은 엔비디아에 분기마다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안겨주는 주요 수익원이다. 지난 4월 이 칩의 수출이 잠시 금지됐을 때, 엔비디아는 약 80억 달러의 예상 매출 손실이 생길 뻔했다고 밝혔다. 그 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7월 판매를 다시 시작하도록 특별 허가를 내주었다.

실리콘밸리의 기술과 보안 전문가들 역시 정부나 해커가 기기를 원격 조종하거나 데이터를 빼돌릴 수 있는 '백도어'가 제품에 있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지키고 있다. 과거 애플 또한 정부의 '백도어' 설치 요구에 공개적으로 맞섰다. 리버 최고 보안 책임자는 "백도어는 해커에게 악용될 수 있는 위험한 취약점이며 정보통신 보안의 기본 원칙을 어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칩에 킬 스위치를 심는 행위가 "마치 자동차 대리점이 '손님이 운전하면 안 된다고 판단할 때를 대비해' 주차 브레이크용 원격 조종 장치를 따로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빗대며, 사용자가 바로잡을 수 없는 영구적인 흠이자 재앙을 부르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과 연방수사국(FBI)은 이번 불법 유통 사건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