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년간 기술유출 수사 31% 급증…인력 빼가기에 사이버 공격까지 이중고
대만·한국, 국가안보 차원서 처벌 강화…기술 방첩 총력
대만·한국, 국가안보 차원서 처벌 강화…기술 방첩 총력

대만 고등검찰청은 지난 8월,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 TSMC의 전직 엔지니어 3명을 국가보안법 위반과 영업비밀 유용 혐의로 기소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은 TSMC 퇴사 후 일본의 주요 반도체 장비업체이자 TSMC의 핵심 공급사인 도쿄일렉트론 자회사로 옮긴 인물이다.
검찰에 따르면 이 전직 도쿄일렉트론 직원은 공급사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TSMC에 재직 중인 동료에게 접근해 영업 비밀을 요구했다. 이들이 빼내려 한 정보는 TSMC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최첨단 2나노 칩용 식각 장비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 쓰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직원은 검찰 조사에서 혐의를 인정했다.
이와 관련해 도쿄일렉트론 쪽은 기소가 이뤄지기 몇 주 전 "내부 조사 결과, 해당 기밀 정보가 제3자에게 공유됐다는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기술 만리장성' 쌓는 중국, 전방위 탈취 시도
이번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대만 법무부를 보면,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간 대만 당국이 수사한 산업 기술 유출 사건은 모두 110건에 이른다. 이는 직전 5년(2014~2018년) 동안 일어난 84건보다 31%나 급증한 수치다.
유출된 기술의 최종 목적지는 대부분 중국임이 드러났다. 지역별 통계 확보가 가능한 가장 최근 자료인 2021년까지 대만 밖으로 데이터가 유출된 51건 가운데 48건(94%)이 중국 본토로 향했다. 미국의 강력한 수출 통제에 맞서 중국이 국가 차원에서 기술 확보에 나서면서 대만 내 산업 스파이 활동을 배후에서 조종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특히 2025년 들어서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해킹 그룹들이 대만 반도체 기업을 표적으로 피싱과 악성코드 공격을 집중하며 내부 정보를 빼내려는 사이버 공격 시도가 부쩍 늘었다.
이직을 통한 인력과 기술 유출 문제도 심각하다. 2000년대부터 수많은 대만 반도체 기업의 고위 임원들이 중국 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국의 대표 파운드리 업체인 중신궈지(SMIC) 설립자는 창업 당시 TSMC에서 함께 일했던 기술팀을 통째로 데려가기도 했다. 대만의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내부 승진에서 밀린 엔지니어들이 파격 조건을 내세운 중국 기업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기술 주권' 수호 나선 韓·대만…처벌 강화로 맞대응
상황이 나빠지자 대만과 한국 정부도 기술 방첩 역량을 키우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대만 당국은 2022년 국가보안법을 고쳐 기존에 영업비밀보호법으로 다루던 '경제 스파이' 행위를 국가 안보 범죄로 격상하고 처벌을 강화했다.
반도체를 국가 핵심 산업으로 삼는 한국 역시 대응을 강화하고 있다. 정부 통계를 보면 2019년부터 2023년 사이 적발된 산업 기술 유출 사건 96건 가운데 38건이 반도체 분야에서 일어났다. 이에 한국 정부는 핵심 기업들이 엔지니어 명단을 내고 이들의 출입국 현황을 감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지난해에는 특허청의 기술경찰 수사 권한을 넓히고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처벌 수위를 한층 높였다.
과거 일본 기술을 한국, 대만, 중국이 뒤쫓던 구도에서 이제는 대만과 한국의 최첨단 반도체 기술이 기술 유출의 주된 표적이 됐다. 와세다대학의 오사나이 아쓰시 교수는 "TSMC가 이번 사건을 일찍 알아챈 만큼 기업 신뢰도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전직 도쿄일렉트론 직원의 구속 사실이 대만 언론에 크게 보도된 점은 부담"이라고 짚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기업 사이의 기술 분쟁을 넘어 대만 국가 안보와 직결된 문제로 커지고 있다. 핵심 기술이 유출된다면 대만의 산업 경쟁력 약화는 물론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도 심각한 혼란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만 국방안전연구원의 쑤쯔윈 소장은 "기밀 정보가 실제로 유출됐다면 대만과 우방국 사이의 신뢰 관계를 심각하게 해칠 수 있는 문제"라고 경고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