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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응팔의 성공이 젊은이들에게 주는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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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응팔의 성공이 젊은이들에게 주는 판타지

한대규 한전 강남지사 부장
한대규 한전 강남지사 부장
얼마 전 필자가 고속도로를 자가운전 하는데 대형 현수막에 ‘전 좌석 안전벨트 응답하라’라고 적혀 있었다. 패러디한 안내 카피였다. 종영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한국 방송사를 다시 쓴 케이블 TV드라마 ‘응답하라 1988’(응팔)의 열기가 아직까지 식지 않는다. 19.6%의 대박시청률은 광고로 이어졌다. 지상파 최고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무한도전’ 광고료가 초당 1200만원인데 이를 뛰어 넘었다는 분석이다.

한 방송 관계자는 ‘응팔’ 광고료가 지난해 같은 시간대 방송한 드라마 ‘미생’보다 3배가량 높았다고 했다. 당연히 주요 배역을 맡은 배우들은 광고 모델로 영입되면서 돈방석에 앉았다. 이러한 응팔은 인터넷 블로그, 커뮤니티 게시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동영상 조회수 등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는 시청률뿐 아니라 문화콘텐츠를 주도했다는 큰 의미가 있다.
우리 사회 전반에 ‘응팔의 성공학’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성공 요소는 무엇일까? 필자는 본방과 재방을 면밀히 시청한 후 그 트렌드를 분석하여 정리를 해보았다. 첫째는 전 배역에 악역 한 명 없이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준 착한 드라마 콘셉트가 적중했다. 방송 3사를 포함한 전 TV드라마들이 다루는 내용이 출생의 비밀과 불륜, 선정적 장면 등 강한 중독성을 보이는 기존의 막장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화적 함의가 있었다. 한 장면을 예로 들면 천재 바둑기사로 나오는 택이가 큰 경기를 앞두고 친구 덕선에게 “덕선아, 나 져도 되지?”라는 멘트에 덕선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는다. 어린 나이에 철이 들어 어른의 세계로 진입한 소년이 감당할 삶의 무게가, 덕선이에 대한 애정의 정도가, 그것을 표현하는 용기까지 더해져 매우 인상적이었다. 성취를 이룬 사람들도 늘 내리막길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하는 치열한 경쟁시대인데 하물며 우리가 삶의 숱한 좌절이나 시련을 겪더라도 한 명만 날 믿고 지지해준다면 상실과 두려움 없이 다시 도전할 힘이 생긴다.

둘째, 핵가족과 1인 가구 증가로 잃어버린 가족의 정(情)과 향수를 자극하는 추억의 소품이 완벽하게 결합했다. 또한 오늘날 각박한 세상 속에서 잊었던 따뜻한 공동체에 대한 아련한 사랑과 추억을 녹여냈다. 백미는 가족, 이웃 간의 소소한 사랑과 일상에 1980년대 배경과 소품들의 디테일이 가미되면서 최대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드라마 곳곳에 크라운 병맥주, 홍콩 배우 주윤발이 나왔던 밀키스 광고, 브라보콘, 보온도시락, 마이마이 카세트플레이어, 못난이 인형,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가 그려진 연필깎이, 가나초콜릿, 꼬깔콘, 석유곤로, 연탄 보일러 등이 그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여 시청자들의 공감을 샀다. 필자는 어린 나이라 기억에 없지만 필자 누나(58)는 “어릴 때 덕선이처럼 우리 식구가 연탄가스에 죽을 뻔한 적이 있다. 당시 엄마가 동치미 국물을 먹여 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셋째, 사오정, 오륙도, 흙수저, 헬조선 등 우울한 현실에서 이삼십대가 큰 위로와 위안을 받았다. 당시에도 막막하기만 했던 미래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저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잘 살아 나갔다. 택이는 연전연승하는 프로 바둑기사로, 선우는 의대생으로, 보라는 서울대생으로, 정환은 공군사관학교 생도로, 정봉은 백종원 같은 요리연구가로, 모두 개천에서 용 난 듯하지만 그때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누구나 열심히만 하면 강남의 비싼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수능·내신·논술이 죽음의 트라이앵글이 된 지 오래인 지금의 아이들에겐 꿈 같은 얘기다. 오직하면 중2 아들을 둔 엄마가 아들에게 “너는 꿈이 뭐니?”하고 물으니 아들이 “재벌 2세요”라고 답해 엄마가 기절초풍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현실을 우리 아이들만 탓할 수 있을까.

넷째, 기존의 스타급 유명 배우 대신 가능성 높은 신인급·조연급 배우를 캐스팅하여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응답하라’ 시리즈 중 1997에서는 가수 서인국과 걸그룹 에이핑크의 정은지가, 1994에서는 정우, 유연석, 손호준이, 응팔에서는 걸그룹 걸스데이의 혜리, 류준열, 박보검, 안재홍이 큰 인기를 누렸다. 한편 연극무대 출신 조연급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로 드라마의 재미가 배가 되었다. 이들 배우는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찍은 광고만 70편에 달하고, 본방송을 놓친 시청자들이 응팔 VOD서비스에 몰리면서 다시 보기 콘텐츠에서 1위를 차지했다. 여기서 나온 매출만 50억원이 넘고 리메이크한 1980년대 음악들의 OST 음반, 음원 수익까지 더하면 총 250억원 이상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응팔의 성공은 1980년대를 경험했던 윗세대에게는 추억과 향수를 주고, 당대를 겪지는 않았으나 청춘이라는 공통분모로 드라마 속 인물들에 몰입할 수 있었던 젊은 세대에게는 판타지를 주었으니 폭넓은 세대의 공감대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한대규 한전 강남지사 부장(전 인재개발원 책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