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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그 붉은 그리움 '꽃무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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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그 붉은 그리움 '꽃무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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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숲해설가 모임을 따라 계룡산에 다녀왔다. 단풍을 즐기기엔 아직 이르지만,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을 오르며 풀과 나무와 꽃을 볼 수 있어 행복한 산행이었다. 산을 오르기 위해 동학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을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일행 중 한 명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손을 뻗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손끝이 향한 곳에 꽃무릇이 한 송이 함초롬히 피어있었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받은 진홍의 꽃무릇은 멀리서 보아도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매혹적이었다.

꽃무릇하면 영광 불갑사나 용천사, 선운사 꽃무릇을 떠올리게 된다. 마치 붉은 페르시안 양탄자를 펼쳐놓은 듯 무리지어 피어 있는 모습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때로는 이처럼 홀로 피어 있는 모습은 애잔함으로 다가온다. 서둘러 카메라를 꺼내어 그 고운 모습을 담기 위해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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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

잎 하나 없이 곧게 뻗은 한 줄기 꽃대 위에 여러 송이의 진홍의 꽃이 우산 모양을 이루며 피어 있는 모습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꽃송이마다 가장자리가 주름진 여섯 장의 꽃잎이 둥글게 뒤로 말린 모습도 아름답지만 꽃잎보다 길게 뻗은 수술은 마치 여인의 긴 속눈썹처럼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많은 사람이 꽃무릇을 상사화라 부르기도 하는데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점은 같지만 상사화는 한여름에 피는 꽃이고 꽃무릇은 가을에 피는 꽃이다. 상사화는 봄에 잎이 먼저 피고, 꽃무릇은 꽃이 시든 후에 가을에 잎이 핀다.
알뿌리가 마늘을 닮아 ‘돌마늘’이란 의미로 석산(石蒜)이라고도 불리는 꽃무릇은 어느 한 곳에 뿌리를 내리면 왕성한 번식력으로 금세 주위를 꽃무릇 천지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무리지어 꽃무리를 이룬다 해서 꽃무릇이란 이름을 얻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다. 어느 꽃도 스스로 지은 이름을 지닌 꽃은 없다. 꽃의 이름이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지어진 이름일 뿐 정작 꽃들은 제 이름에 무심하다.

어떤 꽃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 그 쓰임새에 관련한 이름을 얻었고 어떤 꽃은 그 생김새에 따라 사람들의 상상에 의해 이름이 붙여졌다. 꽃들은 오직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 벌 나비를 유혹할 화려한 꽃빛과 매혹적인 향기와 꿀을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할 따름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이름이 어떤 식으로 불리든 그것은 꽃들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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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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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

상사화가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서로를 그리워하는 꽃이란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상사(相思)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란 필연적으로 마주침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인데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꽃과 잎이 서로를 그리워 한다는 게 도무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상사화란 이름도 사람들이 꽃의 생태적 특성에다 자신의 정서를 대입시켜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름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불리길 원한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이름이 검색되길 바라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길 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꽃처럼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향기로운 꿀을 만드는 일엔 인색하다. 누구나 주목받는 사람이길 원하지만 주목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름을 크게 새긴 명함을 돌릴 일이 아니라 자기만의 향기를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산다. 꽃들은 제 이름을 팔지 않는다. 꽃들이 자신의 열매를 맺는 데 도움을 주는 벌 나비를 위해 자신의 색이나 모양을 가꾸고 향기로운 꿀을 빚듯이 이름을 얻기 위해선 스스로를 먼저 가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