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카페에서 띄우는 인문학 편지(33)]
인덕과 신의로 천하의 패자로 우뚝…적까지도 무한 신뢰 보내상대 존중하고 배려하고 약속 지키면서 신뢰라는 자본 쌓아야
그루야! 드디어 새해가 밝았구나. 지난해 초 너를 만나 짧게는 1년을, 길게는 너의 삶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고 약속한 지 벌써 1년이 다 지나갔구나! 작년부터 지금까지 네가 학교생활에 힘들어 할 때, 나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도 떠오른다. 이제 새해가 되고 겨울 방학이 끝나면 너도 고등학교를 떠나게 되겠지. 겨울잠을 자는 짐승이 새봄에 더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되듯이 지금의 너도 다가올 청춘, 그 눈부신 시간을 준비하는 도약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네가 살아갈 미래 세대의 평균 수명이 100세를 넘어갈 것이라고 하니, 네가 맞이한 20대의 출발은 너 홀로 세상을 향해 걷기 시작한 출발점일 뿐이란다. 사춘기의 어려움을 현명하게 극복하고 이제 새로운 대학 생활을 힘차게 시작하는 그루에게 오늘은 19년이란 험난한 세월을 뚫고 중국 춘추 5패 중에 두 번째 맹주가 된 진문공(晉文公) 이야기를 해줄까 한다. 알다시피 춘추전국시대 천하를 호령한 맹주가 제환공, 진목공, 진문공, 송양공, 초장왕이란다.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각 지역의 숱한 제후들을 한 곳에 모아 충성서약을 받으면서 천하를 호령하고 중앙의 천자를 받들던 그야말로 맹주(盟主)들이지.

이때 적나라로 피신한 중이의 나이는 43살이었으며, 중이를 따르는 사람은 외숙부인 호언(狐偃)과 가신인 조쇠(趙衰), 선진(先軫), 가타(賈佗), 위추, 개자추(介子推), 호숙(壺叔), 전힐(顚詰), 사공계자(司公季子), 호모(狐毛), 가륜(賈倫) 등이었다. 이들 참모들은 오랜 세월 중이의 곁에서 충성을 다하였으며, 중이도 이들 참모들의 건의를 언제나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중이가 망명을 떠나자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도 않고 그 험난한 삶의 여정에 기꺼이 따라나선 것이다. 중이가 조국을 탈출한 후 진나라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동생 이오를 먼저 제위에 올린다. 이오는 형인 중이보다 권모술수에 능했고, 강대국인 진목공의 후원 아래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중이의 동생인 이오가 먼저 왕위에 오르지만 그는 자신을 지원한 진목공과의 하서(河西) 5성 할양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신뢰를 잃게 된다. 이에 따라 진나라 내외의 강력한 지원과 함께 중이가 제위에 오르는데 그 세월이 장장 19년이 걸린 것이다.
중이가 19년이란 긴 시간 동안 중국천하를 기약없이 방랑하던 시절 이런 일화가 있었다. 초성왕(楚成王)이 자신을 도와주는 데 대한 보답으로 훗날 부득이 진(晉)과 초(楚)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진나라 군대를 3사(舍)나 뒤로 물리겠다는 약속을 한다. 사(舍)란 30리를 말한다. 춘추시대에는 군대가 행군할 때 하루에 1사(舍)를 움직였다. 따라서 3사는 90리로 3일의 행군거리에 해당하였다. 이때에는 상대에 대한 예의로 군대를 뒤로 퇴각하는 일이 빈번하였고, 이를 인의(仁義)라고 여겼다. 훗날 성복전투에서 초나라와 대적하게 되었을 때, 진문공 중이는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긴박한 전쟁 상황에서 3일의 행군 거리를 물린다는 그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어쩌면 승부를 결정할 수도 있는 너무나도 엄중한 순간에 상대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심각한 패배를 겪을 수도 있고, 전쟁에 패한다면 국가 전체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 수도 있을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중이는 자신이 어려운 시절 도와주었던 초성왕과 걸었던 약속을 단단히 지킨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군대를 삼사나 물리고 약속을 지킨 뒤 그 전투에서 대승하여 초나라를 격파한 뒤 천하의 맹주 자리에 오르게 된다.

19년 동안 천하를 기약없이 떠돌다가 제위에 오른 진문공의 최고 미덕은 바로 신뢰였다. 타국을 전전하면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이는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훗날 반드시 보답하였으며, 어떤 약속이든 엄중하게 여겨 최선을 다해 지켰다. 타국에서 만난 여러 부인들과 그 자식들도 자신이 제위에 오른 후 조국 진나라에서 받아들여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19년이란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사람도 배신하지 않고 진문공 중이를 지켜 준 참모들도 훌륭하지만 그 참모들이 진문공 중이를 진심으로 따를 수 있게 한 핵심 요인도 결국 “신뢰”였다는 점도 대단하지 않니? 심지어 전쟁터에서 열흘 만에 적의 성(城)을 공략하지 못하면 철수하겠다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비현실적인 약속도 중이는 굳게 지켰다. 중이가 단 사흘만이라도 연장하여 공격하자는 부하들의 건의를 뿌리치면서 자신이 했던 약속을 지키고, 상대국민들까지 복종하고 항복하던 상황은 지금 생각해 봐도 대단하지 않니?
그루도 살아갈 인생에서 숱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다양한 영역에서 역할을 수행하겠지. 어떤 역할을 하든 수많은 약속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도 하겠지. 아주 사소한 말이라도 자신이 상대방에게 한 약속은 모두가 엄중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약속을 지키면 신뢰가 쌓일 것이다. 그러한 신뢰가 바탕이 되고 그루의 사회적 자본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할 것이고 훗날 그루가 어떤 위치에 있든 그 자본들이 네 인생에 커다란 힘이 되겠지. 진문공 중이처럼 19년이란 긴 세월을 방랑하면서 제위에 오를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루가 긴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단다.
그루야!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구나. 올해 1년 동안 그루가 정말 많이 성장했다. 공부에도 새롭게 눈을 뜨고 친구나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매우 원만하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기 초에 비해 너무나 밝아진 표정이 보기 좋더구나. 쉬는 시간에 교실을 지나가다 보면 책을 읽거나 수학 문제를 풀다가 나를 발견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단다. 한층 여유롭게 사람을 대하고 밝은 미소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보면서 그루가 앞으로 정말 멋지게 살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한겨울 비가 고즈넉하게 내리는 영도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새해 첫 편지를 보낸다.
2016년 1월 13일
터기쌤 최선길(그루터기 100년 학교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