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부모 처지가 절망스럽다 해도 자녀 목숨 빼앗을 권리 없어

공유
0

부모 처지가 절망스럽다 해도 자녀 목숨 빼앗을 권리 없어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239)] 유나양은 동반자살한 것이 아니다

유나양이 가족들과 함께 발견된 전남 완도군 신지면 송곡선착장의 전경. 사진=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유나양이 가족들과 함께 발견된 전남 완도군 신지면 송곡선착장의 전경. 사진=뉴시스
최근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10세 소녀 유나양 가족의 실종이 결국 비극적인 죽음으로 확인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비탄에 젖게 했다. 특히 부모와 함께 한 달간 제주도로 현장학습을 떠난다고 들떠있었을 유나양의 마음을 생각하면 더욱 더 침통해진다. 처음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동반자살(同伴自殺)'이라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종류의 비극을 과연 동반자살이라고 불러야하는 지에 대해 반론이 강하게 일고 있다.

동반(同伴)의 사전적 의미는 "일을 하거나 길을 가는 따위의 행동을 할 때 함께 짝을 함"이다. 그리고 자살(自殺)은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음"이다. 그렇다면 동반자살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함께 짝을 해서 같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상 가장 유면한 동반자살의 주인공으로 「사의 찬가」를 부른 윤심덕을 꼽는다. 1926년에 일본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에서 윤심덕은 연인 김우진과 함께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이처럼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비관해 함께 자살하는 것을 '정사(情死)'라고 불렀다.
요즘에도 이루지 못할 사랑이나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동반자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에는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호소하던 여고생 2명이 함께 자살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평소 단짝이었던 이들은 발견 당시 한쪽 다리와 팔을 운동화 끈으로 서로 묶은 채 쓰러져 있었다. 투신 장소인 아파트 옥상에는 이들이 마신 것으로 보이는 소주병 2개가 발견됐으나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위의 두 사건은 동반자살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들에서 이유가 무엇이든지 당사자들이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함께 자살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나양의 경우처럼 어린 자녀와 함께 부모가 자살을 하는 것이 과연 동반자살인지는 면밀히 따져보아야 한다. 최근에는 '아동살해'나 '자녀살해' 또는 '가족몰살'이 더 적합한 표현이라는 주장이 점차 공감을 얻고 있다. 왜냐하면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면 부모가 자신의 뜻대로 자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오도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의 처지가 매우 절망스럽다 해도 자녀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는 당연히 없다. 이 글에서는 동반자살이라는 용어 사용의 타당성 여부를 논하기보다 왜 우리나라에는 소위 '동반자살'이 많은지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문화를 '집단주의' 혹은 '관계중심주의'라고 부른다. 이는 서구 문화를 '개인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대비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집단주의'는 한 마디로 정의하면 행동의 최소 주체를 집단으로 보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개인주의'는 행동의 최소 단위를 개인으로 보는 것이다.

이루지 못할 사랑 등 목숨 끊는 경우 종종 있어


최근까지 초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의 첫 번째 단원이 이렇게 시작된다. "너 나 우리,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아기 아기 우리 아기, 아버지 어머니 아기 나 우리는 가족." 그런데 처음 영어를 배울 때로 돌아가서 익힌 내용을 상기해보자. 필자가 처음 중학교 영어시간에 배운 내용은 "I am Tom. You are Mary."이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교과서의 내용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즉 나와 너의 정체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톰이야" "너는 메리야"가 언어를 배울 때 제일 먼저 나온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나와 너의 정체성이 중요하지 않다. 나와 너는 '우리'를 형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화목한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나'와 '너'를 구분하는 정체성 혹은 개성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개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가족"에서 나타나있듯이, 우리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은 가족이다. 그래서 '나의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고, '나의 어머니'가 아니고 '우리 어머니'이다. 즉 가족은 항상 복수(우리)이며, 가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은 구별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인 '우리'로 존재해야 한다. 이런 문화에서는 "우리가 남이가?" 또는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는 항상 뭉클한 감동을 준다.

'가족동일체'의 문화에서 부모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자식이 잘 되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도 자녀의 '입신양명'을 위해 부모는 모든 희생과 헌신을 다 해야 할 것을 암암리에 강요받는다.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불리한 지정학적 환경과 빈약한 자연 자원을 가지고 있고, 또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면서도 당당하게 세계 경제의 일익을 담당하는 선진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모든 고초를 마다하지 않고 헌신하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이런 헌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배경에는 자식의 미래는 부모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동시에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를 평가하는 기준은 자식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성공했는지에 달려있다. 부모가 실제로 자녀에게 어떤 교육을 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자녀가 성공했으면 부모가 교육을 잘 시키고 책임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자녀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불성실한 부모가 되는 것이다.

이런 문화에서 부모가 자녀와 함께 자살하는 소위 '동반자살'이 많은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만약 부모 자신이 자살을 하면 혼자 남겨진 자녀가 살아가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되면 차라리 함께 "데려가는 것"이 더 부모의 마지막 책임을 다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녀가 너무 살아가기 힘들면, 차라리 자녀를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집단 따돌림 호소 여고생 2명 함께 자살도 충격


문화는 한 조직이 환경에 적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므로 환경이 변하면 문화도 변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5000년 가까이 외우내환에 시달려온 환경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족뿐이라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자녀를 잘 키워 성공시키면 그 덕에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가족동일체' 문화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지정학적 환경은 비록 동일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단순히 지정학적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제력이든지 군사적인 환경이 더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환경이다. 이런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는 오히려 가족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적성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해주는 것이 가족 전체에게도 유리하다.

2020년 11월 18일 미국 퓨리서치센터에서 발표한 결과는 우리 문화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전 세계 성인 1만7000명을 대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한국인들은 '물질적 풍요'를 1순위로 꼽았다. '물질적 풍요', 즉 '돈'을 1순위로 꼽은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삶의 의미를 주는 제1의 가치는 '가족'이다. 전체 응답자 중 38%가 '가족'을 꼽았다. 17개국 중 14개국에서 가족은 1위에 올랐다. 반면 한국인들은 삶의 의미에서 1순위로 '물질적 풍요'를 꼽았다(19%). 그 다음은 건강이었고(17%), 가족은 3위에 지나지 않았다(16%).

이미 가족을 삶에서 제일 중요한 의미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조사 결과다. 다시 말하면 가족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집단주의적' 사고가 빠르게 개인주의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자식의 미래를 더 이상 부모의 책임으로 여기거나, 더 나아가 자식은 부모의 소유라는 생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여론이 점차로 비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는 부모와 자녀는 서로 별개의 존재라는 의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부모와 자식은 서로 심리적으로 '분리(分離)' 되어야 한다. 보통 분리를 이야기할 때 자녀가 부모로부터 분리되는 문제, 즉 자녀가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해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부모와 자녀가 '동일체'로 인식되는 문화에서는 부모도 자녀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즉, 자녀의 삶은 부모가 아니라 자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부모가 자녀로부터 분명히 독립될 때 자녀도 더 이상 부모에게 불필요하게 의존하는 미성숙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