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6월 8일 개봉하는 독립영화 <안나푸르나> 이야기다. 이 영화 시나리오를 직접 쓴 황승재 감독을 만나 영화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필모그래피를 보고 놀랐다. 4년째 매년 작품을 개봉하고 있다. 비법이 뭔가?
"첫 영화를 마치고 10년 가까이 시나리오 개발만 했다. 아시다시피 시나리오는 영화화되지 않으면 휴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개발할 시간에 일단 찍는다.(웃음)
사실상, 2020년 개봉한 첫 영화 <구직자들>이 내게 절처봉생(絶處逢生)이었다.('절처봉생'은 막다른 처지에서 삶을 만난다는 뜻으로, 아주 막다른 판에 이르면 살길이 생긴다는 뜻)
시나리오, 캐스팅, 영화 제작 방식, 이야기 방식 등 모든 것에서 이전에 생각하던 틀을 깨기 시작하니 어느새 다작 감독이 되었다. 특히 늘 함께 작업하는 정필주 프로듀서와 나름의 ‘저비용 고효율’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 <안나푸르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전작인 영화 <구직자들>을 촬영하면서 100여 명의 인터뷰 대상자들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 관련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 과정이 있었다. 그중 절반 정도의 사람들이 '무언가 성취했던 기억'을 이야기했고, 나머지 절반 정도가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대체 '인간관계'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우리를 이토록 행복하게, 혹은 불행하게 할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영화가 바로 <안나푸르나>이다. 멜로 장르의 특성상 연애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관계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 그렇다면 '관계'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영화를 보시면 나름의 답이 있다. 사실, 관계가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보다 '관계성'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다. 누구나 관계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은 한 차례씩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족이든지 연인·친구 등 누구든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럴 때 극 중 선배인 강현처럼 '어깨를 토닥여 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란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안나푸르나>는 '현재'의 내가 관계 때문에 힘들었던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응원 메시지 같은 영화다. 모든 관계는 ‘시절인연’인 것 같다.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자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사실상 힘들다."
- 많은 배우들이 나온다. 어떻게 캐스팅했나?
"배우분들 역시 ‘시절인연’인 것 같다.(웃음)
배우 김강현 씨는 전작인 <썰>에서 호흡을 맞춰서 시나리오 나오기 전부터 캐스팅이 되어 있었고, 차선우 씨는 원래 친분이 있었는데 제대하자마자 제일 먼저 시나리오를 내밀어서 흔쾌히 수락받았다. 그리고 각자의 상대 여배우들은 김강현, 차선우 각각의 연결고리를 통해 캐스팅됐다.
내가 원래 캐스팅 복이 있다. 여태까지 늘 좋은 배우들과 함께한 것 같다.
사실 좋은 배우들과 작업하면 현장에서 따로 연출할 일이 없다. 그저 배우들의 연기를 관객보다 먼저 감상한다고 생각한다."
- 맞다. 특히 김강현과 차선우 두 배우 간의 티키타카가 좋다. 배우들의 대사가 어디부터 대사고, 어디부터 애드리브인지 분간이 안 간다. 배우들에게 특별하게 요구하는 점이 있나?
"현장에서 특별히 요구하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사전에 가급적 많이 미팅을 해서 그들의 장점을 최대한 발견하고, 그것을 촬영용 대본에 반영했다. 가장, 자신다운 모습일 때 화면에서도 설득력이 생긴다고 본다. 감독이 어떤 영화를 찍더라도 결국 관객들이 보는 것은 배우이기 때문이다."
- 극 중 강현(김강현)과 선우(차선우)의 연애 에피소드가 예사롭지 않다. 실제 경험에서 나온 건가?
"70퍼센트는 그렇고, 나머지는 꾸며낸 이야기다. 혹은 배우들이 힌트를 준 것도 있다. 특히 ‘들릴 수 있는 거리만큼 조절해서 소리를 낸다’는 극 중 강현이 터득한 ‘구역발성법’은 실제 김강현 씨의 아이디어다. 종종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흘려보내는 상황을 반어적으로 자신이 안 들리게 소리는 냈다는 것으로 표현한 거다.
어쩌면, 그동안 고백을 해도 못 들은 척했던 연인들에 대한 일종의 소심한 ‘방어기제’라고 볼 수 있다.(웃음)"
- 영화 전반에 북악산이 나온다. 왜 제목이 ‘안나푸르나’인가?
"제목 역시 김강현 씨가 지었다. ‘안나’와 ‘푸름이’가 여주인공들의 극 중 이름이라서.(웃음)
나의 현재는 북악산에 있지만 태평양, 인도양 너머 저 높은 곳 어딘가에 누구나 꿈꾸는 무언가를 상징한다. 모두의 삶이 각자의 ‘안나푸르나’를 향해 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누구는 평생 둘레길만 걸을 수도 있고, 또 누구는 전망대까지만 오를 수도, 어느 누구는 운 좋게 산의 정상까지 오를지 모른다.
그 끝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꼭 정상, 즉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 황승재 감독의 마음속에 있는 ‘안나푸르나’는 무엇인가?
"영화에서처럼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하고픈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그들로 인해 마냥 행복했으며 앞으로도 행복할 거니까! 그런데, 막상 개봉을 앞둔 요즘은 ‘영화’라는 것이 어쩌면 내 인생의 ‘안나푸르나’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영화 개봉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 이해한다. 요즘 영화계가 무척 어렵다고 한다.
"사실, 나는 늘 어려웠다. 한때는 흥행에 참패한 '상업 영화' 감독이었고, 지금은 수익성이 거의 없는 '독립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이다.
하지만 작은 영화를 만들면서부터 큰 성공을 거두긴 어려워도 나름대로 실패하지 않는 방법을 하나둘씩 체득하고 있다. 앞으로는 지금 하는 작업들을 지속 가능케 하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그것이 나한테는 곧 성공이다. 작품을 만들 때마다 늘 유작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내년에도 개봉할 것인가? 차기작 계획은?
"물론 준비하고 있다. 다시 SF장르로 돌아간다. 전작 <구직자들>의 세계관을 발전시킨 이야기이다. 기대해 달라.
늘, 인터뷰 말미에 하는 이야기가 있다. 대중들에게 독립 영화는 모든 면에서 상업 영화에 비해 낯설 수 있다. 내가 만들고 있는 독립 영화는 어쩌면 독립 영화계에서조차 낯선 영화다. 하지만 이렇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인식해 줬으면 좋겠다. 기존의 틀에 들어가지 않으면 영화를 못 만드는 것처럼 생각들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고 싶다.
결국, 나만의 '새로운 유작'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러기에 '황승재의 새로운 유작 만들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정준범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jb@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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