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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긴 여정의 첫 걸음] 현대백화점 부회장 출신 이동호 수필집, "라면 국물에 밥 말아먹듯 아직 남은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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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긴 여정의 첫 걸음] 현대백화점 부회장 출신 이동호 수필집, "라면 국물에 밥 말아먹듯 아직 남은 게 있다"

어린 시절 고향 얘기부터 월급쟁이·부회장까지 인생 스토리
고즈넉함과 과장 없는 푸근함이 교차...유일한 욕심은 '평온'
지리산을 넘어온 가을 바람이 나주 작은 마을 너른 들판을 뜬 눈으로 지킬 때, 소년은 나무에서 떨어진 홍시의 달콤함에 빠진다. 장대를 들고 사다리에 의지한 초로의 아버지는 웃으며 감나무 홍시 떨어진 자리를 어루만진다. 햇살 머금은 바람이 붉게 물든다.

소년이 그 시절 아버지보다 늙어 글을 썼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나듯이 어린 시절 나뭇잎배 같은 추억 한 조각 불러내 동요 부르듯 읽어주고 시냇물 흘러가듯 들려준다.

이동호 수필집 '긴 여정의 첫 걸음'은 이렇게 평온하다. 고즈넉함이 씨줄이라면 푸근함이 날줄되어 그렇게 일상을 엮었다. 그 일상이 평화롭다.

 '긴 여정의 첫 걸음' 표지. 바른북스 간/ 이동호 지음/ 264쪽/ 20,000원이미지 확대보기
'긴 여정의 첫 걸음' 표지. 바른북스 간/ 이동호 지음/ 264쪽/ 20,000원

'5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내느라 논밭을 팔아가며 사셨던 살림살이, 얼마나 쪼들렸을까. 들녘에 남았던 아버지의 땀방울이 무엇이었나 깨닫고 아버지가 판 것은 논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애였고 그 논에서 자라난 것은 나락이 아니라 5남매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p 53, 요약)

늘 평화롭고 조용하면서 일상은 걱정 없는 것처럼 하루하루 지나갔지만 아버지의 손은 늘 가족 생계를 위해 거칠어지고 머릿속은 언제나 계산이 복잡했다. 우리는 그 신산함을 그저 땀방울로 뭉뚱그리곤 한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무게는 다시 내게로 온다. 그게 인생임을 이동호는 함축적으로 말한다.

'공군 장교 전역 후 늦은 나이에 입사한 현대그룹, 장교 복무 중 익힌 보고서 작성 능력과 세무 지식을 총동원하며 악착같이 일해 특별 승진을 거듭한다. 그토록 가기 싫어하던 군 생활을 무려 5년5개월한 덕분에 대그룹에 입사했으니 이게 새옹지마 아닌가' (p 59, 요약)

군대 가는 게 싫어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결국 남들보다 더 길게 복무했다. 그리고 신혼의 이동호는 성실하게 복무했다. 그 성실이 대기업 공채로 이어졌고 다시 승진의 길로 들어선다. 주식 같은 '외도'에 한눈 팔지 않았음이 비결이라면 평범한 비결이었다.

'긴 여정의 첫 걸음' 저자 이동호. 책 속의 삽화. 1955년생으로 광주서중 광주일고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공군 대위 전역 후 현대그룹 공채에 합격,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이미지 확대보기
'긴 여정의 첫 걸음' 저자 이동호. 책 속의 삽화. 1955년생으로 광주서중 광주일고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공군 대위 전역 후 현대그룹 공채에 합격,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은퇴를 하고 나니 해장라면 찾는 일도 옛 일이 됐다. 평생 몇 천 그릇 먹었을 라면과 거리를 두니 서운해진다. 라면에 김치 얹어 후루룩 넘기던 시절은 눈 깜빡할 새 지나갔다. 그러나 면을 다 건져 먹었다고 해서 라면이 끝난 건 아니다. 남은 국물에 찬밥 한 덩이를 말아 먹을 수 있는 '마무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p 65~66, 요약)

은퇴하면 술과 멀어지며 해장라면 기회도 줄어든다. 해장라면 즐기던 그 시절이 눈 깜빡할 새 지나갔지만 은퇴 후 하루는 꽤나 길어진다. 그래도 라면 국물에 찬밥 말아먹는 마무리, 그렇게 라면 냄비를 비우고 찬밥 그릇을 비우면 포만감과 함께 '보람찬 하루'를 마친 기분이 밀려온다. 마침표 같다.

이는 앞만 보고 달려온 뜨겁고 격렬한 청춘의 시간 뒤 찾아오는 여유와 성찰이다. 뜨거움이 가시고 나면 이제 진국이 드러나듯 인생의 굽이굽이 지나온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 진정 깊은 맛 아닐까. 그러나 얼마나 소박한가. 찬밥 한 덩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나아갈 때 가져야 마땅한 따뜻함과 이 소박함. 이동호는 라면에서 철학이라는 면을 건지고 독자들에게 국물이라는 인생의 맛을 깨닫게 했다.

가족들이 광주 부모님 집에 모인 자리, 선거 얘기는 안하는 게 불문율이지만 이동호는 1992년 정주영 대통령 후보 선거 복판에서 실무작업을 했기에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 관심이 없을 수 없었다.

'형님 부부는 김대중 2번, 누님은 1번 김영삼, 나는 당연히 정주영 3번, 그런데 아내는 머뭇거리더니 2번이라고 한다. 묘한 배신감. 어머니는 차분하게 3번이라 하신다. 내 자식이 정주영 밑에서 일하는데... 나는 무조건 자식 편이라고 하신다. 방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p 98, 99 요약)

설명이 필요 없다. 정치나 종교 문제는 누구나 좀처럼 물러서지 않지만 어머니에겐 어떤 것보다 자식이 먼저였다.

'이삿날 전날 밤 만취해 집에 들어와 쓰러져 잤는데 누군가 흔들어 깨워 눈을 떠보니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서 있었다. 세간살이는 다 옮겨져 휑했고 혼자 요를 깔고 누워 있었던 것. 택시 타고 이삿짐 트럭 뒤를 따라 새집으로 갔다. 둘째 출산을 앞두고 1박2일 회사 야유회를 갔다오니 집주인이 애 낳았으니 얼른 병원 가자며 데려다 주었다' (p 103, 104 요약)

요즘엔 상상이 안되는 일. 그 시절 무용담, 전설처럼 내려오는 말일 터. 이동호는 아내가 말없이 단단하게 가정을 지켜왔다고 한다. 그래도 아파트 평수 좀 넓혀 가자는 말을 끝내 듣지 않은 건 배가 아플 정도로 후회된다고 했다. 아내는 아직 연애편지를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이동호는 고백한다. 젊은 날에는 벽돌을 높이 쌓기만 하면 집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보이지 않는 땅속의 기초가 단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먹고, 잘 자고, 자주 웃는 일. 그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 어쩌면 가장 단단한 기초일 것이라고.

홍시의 달콤함을 잊지 못하는 유년의 맛이 라면 국물에 찬밥 말아먹는 은퇴자의 맛을 거쳐 이제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 참맛임을 되뇌인다. 잔소리 같은 이동호의 한 마디. 미련을 버려라.


엄정권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tastoday@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