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증후군 벗어나 글로벌 합작에도 적극…한국·중국에 반격 도모
이미지 확대보기관련 기업들은 자발적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정부의 구조조정 대책은 이미 다 나온 얘기를 반복하는 수준”이라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업계 사정을 파악하지 못한 ‘탁상행정’이란 의견도 속출하고 있다. 특히 이번 논의를 촉발시킨 조선업에 대한 안건은 아예 제외돼 논란이 일고 있다. 구조조정이 가장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대책조차 마련하지 못한 게 아니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이유다.
우리 정부는 이번 구조조정 방안이 부실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선제조건이라며 ‘무조건적인 감축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일본은 기업의 자발적 구조조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을 마다하지 않는다. 1990년대 장기침체로 인한 ‘잃어버린 10년’, 1990년대 구조조정에 실패해 ‘잃어버린 20년’을 자초했던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다. 특히 공동 출자로 투자 부담을 줄이고 생산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히노마루(日の丸, 일장기) 연합’을 통해 한국·중국 등에 대한 반격을 도모하고 있다.
삼성전자에 반도체 시장 1위를 내주며 처음 결성된 일본의 ‘히노마루 연합’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TV 등 전자 분야에 이어 조선, 철강 등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등 첨단분야에서도 연합전선을 짜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고도 독자 기술만 고립하며 국제적인 고립에 빠졌던 ‘갈라파고스 증후군’ 일본이 변하고 있다”며 “샤프가 일본 내 라이벌인 재팬디스플레이(JDI)와 손을 잡은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했다. 사업재편이 지지부진한 한국과 달리 민·관이 똘똘 뭉쳐 전의를 다지는 모습은 과거와 달리 위협적이란 의미다.
이미지 확대보기지난 2013년 6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산업경쟁력강화법’ 제정을 추진하며 시작된 일본의 사업재편은 정유·석유화학 등 기간산업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정부가 2014년 6월 정유업계에 산업경쟁력강화법을 적용하자 2015년 11월 일본 2위 정유사 이데미쓰코산과 5위 쇼와셸석유가 합병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업계 최대 기업인 JX홀딩스와 3위 도넨제너럴석유도 경영 통합을 발표했다. 석유화학업계에서도 스미토모화학이 연산 41만5000t 규모의 지바현 에틸렌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등 업계 내 공장 폐쇄와 통합이 진행되고 있다.
일본의 선제적인 사업재편 움직임은 업계의 자율적인 행보에 일본 정부의 산업구조 재편 유도정책이 더해진 결과다.
최근 발표된 한국 정부의 ‘철강·석유화학 생산설비 조정과 사업재편’ 구조조정 가이드라인은 민간 컨설팅 용역 결과를 토대로 일부 제품의 공급과잉 해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업계는 “정부의 구조조정 방침에는 원칙적으로 공감하지만 자율적인 구조조정을 유도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지원 대책이 빠졌다”며 대책 마련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일본의 경우 업계의 공급과잉 구조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면 해당 통합 기업에 세제 및 금융상 혜택을 부여한다. 일본 기업들이 정부의 산업구조 재편에 적극 나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정부의 연합군 지원…중장기 자본은 물론 CEO 파견까지
일본에서는 기업 간 연합군을 결성할 때 역시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산업 전반으로 확산 중인 히노마루 연합군의 뒤에도 일본 정부가 있다. 아베 정부는 2009년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INCJ)’를 설립해 JDI 등의 통합작업에 개입해 왔다.
일본 제조업 연합군을 지원하는 산업혁신기구는 차세대 먹거리가 될 신산업을 창출하기 위해 산업계와 제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익숙한 비즈니스 모델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발상과 행동을 통해 변혁과 혁신을 추진해 가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특히 산업이나 조직의 벽을 넘나드는 ‘오픈 이노베이션’ 마인드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혁신적인 사업에는 ‘중장기 산업 자본’을 제공하는 동시에 CEO 파견 등을 통해 경영참가형 지원을 실천하는 등 기업 가치의 향상을 전면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조직에 속한 전문가들이 모여 신규 사업을 검토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거나 기술·아이디어를 사업화할 수 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등 오픈 이노베이션 실현을 위한 사회 기반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해 수평 조직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산업혁신기구는 기업·금융기관·투자기관·법률사무소·회계사무소·컨설팅 회사·각 부처 등과의 협업·협력을 통해 소규모 안건에서 수 천억원대의 대형 안건에도 대응 가능한 투자 능력을 갖고 있다.
현재 26개사가 참여하고 있는 산업혁신기구는 정부 출자금 2860억 엔(약 3조1220억원)에 26개사가 각각 5억 엔(54억5805만원)씩 출자한 140억 엔(약 1528억원, 단 일본정책투자은행은 15억 엔), 여기에 설립 당시 각사의 대표가 500만 엔(약 5500만원)씩 출자한 금액을 토대로 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 글로벌 연합군 속출…한국이 갈라파고스?
치열한 글로벌 산업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미 개별 기업 간 경쟁이 아닌 생태계 간 경쟁이 불가피하다. 국익 또는 국가적 목표를 위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급변하는 것도 낯설지 않다.
이에 자국 내 기업뿐만 아니라 글로벌 합작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중국, 일본, 대만이 합작해 중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공장 설립에 나선다는 뉴스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메모리반도체 업계에 큰 충격을 줬다. 정부 주도로 반도체 투자에 뛰어든 중국이 일본과 대만까지 끌어들이며 주도권 확보에 나섰기 때문이다.
특히 폐쇄적인 자국 중심주의에 사로잡혔던 일본 기업들이 해외 기업과 적극적인 제휴를 맺는 등 글로벌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점은 그들이 과거 패러다임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일본 최대 자동차 회사인 도요타는 올 초 실리콘밸리에 인공지능연구소를 설립하고 구글 등에서 글로벌 인재를 스카우트해 연구를 맡겼다. 핵심 사업을 담당할 연구소는 일본 내에 설립하고 자국 내에서 인력을 키우는 게 일반적이었던 도요타이기에 충격은 더 컸다.
전례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은 혼다자동차도 마찬가지다. 혼다는 일본 최초의 소형제트기 ‘혼다제트’ 프로젝트를 위해 미국 동부에 자회사인 혼다에어크래프트 본사와 공장을 설립해 연구를 진행했다.
닛산-르노도 최근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와 ‘커넥티드 카(Connected Car)’ 분야 제휴에 나서는 등 일본 기업들은 과거의 폐쇄적인 자국 중심주의에서 발빠르게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대기업 간 협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에서 경쟁자일 뿐 공조한 경험이 없고 디스플레이 부문 글로벌 1, 2위인 LG디스플레이와 삼성디스플레이 역시 협력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과 자동차를 연결시킨 커넥티드 카 시대가 열리고 있지만 현대차와 삼성전자가 힘을 모은다는 소식은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닛산·르노·MS 연합군에 이어 메르세데스 벤츠·아우디·BMW 등 독일 자동차 3사도 차세대 5G 통신을 활용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이 연합군 동맹에는 미국의 퀄컴과 인텔, 유럽의 노키아, 중국의 화웨이 등 반도체·통신 업체들도 참여할 예정이다.
이동화 기자 dhl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