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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유럽의 방위재편에 합류한 일본과 달리 한국이 보류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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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유럽의 방위재편에 합류한 일본과 달리 한국이 보류된 이유

일본이 참여 신청한 유럽방위기금(SAFE)으로 드러난 전후 질서의 균열
일본과 달리 한국이 보류되고 있는 까닭은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는 등 대전략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평가
독일이 러시아와 전면전에 대비해 최대 80만 명에 이르는 독일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병력을 동쪽 전선으로 신속 배치하는 1200페이지 분량의 비밀작전 계획을 수립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미지=빙 이미지 크리에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독일이 러시아와 전면전에 대비해 최대 80만 명에 이르는 독일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병력을 동쪽 전선으로 신속 배치하는 1200페이지 분량의 비밀작전 계획을 수립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미지=빙 이미지 크리에이터
유럽연합(EU)이 지난 12월13일 일본이 유럽 안보 행동에 참여를 신청했다고 공식 확인한 순간은 단순한 행정 절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전후 국제질서에서 분리되어 있던 유럽과 동아시아의 안보 공간이 하나의 전략적 연쇄로 묶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본은 더 이상 태평양에 고립된 지역 강국이 아니라, 유럽의 방위 산업과 억제 구조 속으로 직접 진입하려 하는 동아시아 강국으로서의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이 참여 신청을 한 260조원 규모의 유럽연합의 방위기금(SAFE)은 겉으로는 방위 생산과 공동 조달을 위한 금융 기금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기금은 실제로는 유럽이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축하는 전략적 자율성의 핵심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금에 일본이 참여하려 한다는 사실은 일본이 자신을 더 이상 미국의 확장 억제만으로 보호받는 국가로 규정하지 않겠다는 신호라고 평가할 수 있다.

SAFE의 본질은 자금이 아니라 권력이다


SAFE는 러시아 위협과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트럼프 2기 미 행정부 하에서 노골화된 미국의 부담 전가 전략에 대응해 만들어졌다. 유럽은 이제 미국이 언제든 전략적 우선순위를 인도태평양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SAFE는 그 결과물이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공동 조달이라는 형식을 통해 방위 산업의 주도권을 유럽 내부에 고정시키는 데 있다. 부품 조달의 대부분을 유럽 내에서 요구하는 규칙은 단순한 산업 보호가 아니라, 전시 지속 능력을 유럽 스스로 확보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는 유럽이 더 이상 미국의 군수 창고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의 선택은 유럽 진입이 아니라 안보 지평의 이동이다


일본의 SAFE 참여 시도는 유럽을 돕기 위한 선의의 협력이 아니다. 이는 일본 자신의 생존 전략이다. 일본은 중국의 군사적 팽창, 대만 해협의 불안정성, 북한의 핵 고도화라는 삼중 압박 속에 놓여 있다. 동시에 미국의 확장억제는 점점 조건부로 변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단일 동맹에 의존하는 구조의 취약성을 인식하고 있다. 유럽 방위 산업과의 연결은 일본에게 또 하나의 전략적 축을 제공한다. 이는 군사 협력의 다변화이자, 억제 신뢰성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다.

유럽이 일본을 받아들이는 이유


유럽 역시 일본을 필요로 한다. SAFE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럽 방위 산업의 생산 능력이 위협 환경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정밀 제조 능력과 방위 기술을 보유한 국가다.

또한 일본은 정치적으로 안정적이며,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가진 파트너다. 유럽이 일본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한 산업 협력이 아니라, 유럽과 인도태평양을 잇는 전략적 연대를 제도화하는 과정이다.

한국이 제한적 범주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


이번에 언론 보도로 확인된 일본의 SAFE 참여 신청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한국과 튀르키예가 제한적 혹은 보류된 범주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다. 참여 신청은 했으나 일본의 신청만큼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이 기술이나 산업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방위 산업 역량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전략적 신뢰와 방향성이다. SAFE는 단순한 구매 프로그램이 아니라, 위기 시 어느 편에 설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선언을 요구한다. 한국은 여전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구상과 명확히 접속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유럽 방위 재편과 인도태평양의 연결


SAFE의 확대와 일본의 참여는 유럽 방위 문제가 더 이상 유럽 내부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러시아 전선과 대만 해협, 중동과 동중국해는 분리된 위기가 아니라 하나의 전략적 연쇄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은 이 연쇄를 관리하는 역할로 이동하고 있으며, 직접적인 보증자는 아니다. 유럽은 유럽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각자의 억제 역량을 강화하며 연결되고 있다.

미 확장억제 이후를 준비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일본의 SAFE 참여 시도는 미국의 확장억제 이후를 준비하는 국가의 전형적 모습이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비핵을 유지하면서도 잠재적 핵 역량과 다중 억제 축을 동시에 구축하고 있다. 유럽과의 방위 산업 연계는 그 일부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확장억제의 신뢰성 문제를 외교적 언어로만 다루고 있다. 그러나 국제 질서는 외교적 선언보다 구조적 준비를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다.

한국 대전략의 결핍이 드러난 순간


일본의 SAFE 참여 시도는 한국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한국은 어떤 질서에 참여하고 있는가. 미국의 동맹인가, 유럽과 인도태평양을 잇는 전략 국가인가, 아니면 여전히 보호를 기대하는 강대국의 안전 보장을 소비하는 국가인가.

향후 10년을 목표로 세계 3~5위권 선진 강국 도약을 추구한다면, 한국은 방위 산업과 안보를 분리해서 사고할 수 없다. 유럽이 방위 산업을 통해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듯, 한국 역시 안보와 산업, 기술과 외교를 하나의 설계도로 묶어야 한다.

자체 핵무장 논의가 구조적 과제가 되는 이유


이 지점에서 자체 핵무장 논의는 더 이상 금기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동맹을 깨는 선택이 아니라, 동맹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선택일 수 있다. 미국과 유럽, 일본이 요구하는 것은 의존이 아니라 기여다.

핵 억제력을 갖춘 국가는 협상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 못한 국가는 관리의 대상이 된다. SAFE를 둘러싼 유럽과 일본의 움직임은 이 냉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유럽의 방위 재편은 한국의 거울이다


SAFE는 유럽의 방위 기금이지만, 동시에 한국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일본은 이미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유럽은 전략적 자율성을 제도화하고 있다. 미국은 선택과 통제를 유지하며 부담을 분산시키고 있다. 이 구조 속에서 한국이 지금의 위치에 머문다면, 세계 질서의 재편은 한국을 중심이 아니라 주변으로 밀어낼 것이다.

한국은 선택의 시간을 맞고 있다


유럽 방위 기금에 일본이 들어오는 장면은 단순한 국제 뉴스가 아니다. 이는 확장억제 이후의 세계가 이미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한국이 이 변화를 인식하고 대전략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선택은 다른 국가들에 의해 대신 내려질 것이다.

이제 한국은 보호받는 국가의 언어를 버리고, 질서를 함께 설계하는 국가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SAFE를 둘러싼 유럽과 일본의 움직임은 그 전환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