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트럼프 대전략의 혼종성

글로벌이코노믹

[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트럼프 대전략의 혼종성

자유주의 패권의 잔존과 현실주의 세력균형 전환 실패가 만들고 있는 질서의 불안정성
한국은 트럼프 미 대통령의 동의에 따라 핵추진잠수함 건조 프로젝트를 본격화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한국의 핵잠수함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게임 체인저'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도산 안창호급 잠수함 3,000톤급 KSS III 잠수함 모습이다. 사진=대한민국 해군이미지 확대보기
한국은 트럼프 미 대통령의 동의에 따라 핵추진잠수함 건조 프로젝트를 본격화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한국의 핵잠수함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게임 체인저'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도산 안창호급 잠수함 3,000톤급 KSS III 잠수함 모습이다. 사진=대한민국 해군

미국의 대중 전략을 둘러싼 논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듯 보인다.

미 경제학자 스티븐 S. 로치는 최근 아시아 언론에 기고한 아티클을 통해 트럼프라는 인물이 만들어내는 외교적 혼란과 정치적 비정상성이 미·중 관계를 구조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으며, 진정한 해법은 ‘포스트 트럼프’의 시대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의 문제 제기는 일정 부분 타당하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들이 평균적으로 유지해온 정치적 정상성, 즉 제도 존중, 전략의 일관성, 동맹 관리의 절제라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로치의 진단은 결정적인 지점에서 멈춘다. 문제의 핵심은 트럼프라는 개인의 불안정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과 현실주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두 대전략이 충돌·중첩·붕괴되는 과도기적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이 구조적 전환을 ‘정리’하지 못한 채, 오히려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혼합하고 있다는 문제를 노정하고 있다.

글로벌이코노믹은 이 글을 통해 로치의 문제 제기를 출발점으로 삼되, 트럼프 2기의 대전략 혼종성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이 왜 우크라이나 전쟁과 동아시아 질서에서 폭발적 불안정을 낳으며, 그 결과 한국이 어떤 전략적 결단을 요구받고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로치의 핵심 주장: 문제는 트럼프다?


로치의 아티클이 제시하는 중심 논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첫째, 트럼프는 예측 불가능하고 충동적이며 개인화된 외교를 구사한다. 둘째, 이러한 지도자 하에서는 미·중 관계에서 지속 가능한 갈등 관리나 타협이 불가능하다. 셋째, 따라서 미·중 관계의 안정은 트럼프 이후, 즉 정치적 정상성이 회복된 미국에서나 기대할 수 있다.

이 논지는 역사적 비교를 통해 강화된다. 키신저–저우언라이, 닉슨–마오로 상징되는 냉전기의 전략외교와 비교할 때, 오늘날의 정상회담 외교는 과도하게 감정적이고 국내 정치에 종속되어 있으며, 실질적 성과를 낳지 못했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의 화려한 정상회담이 결국 관세전쟁과 기술전쟁으로 이어진 사례는 로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경험적 증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분석은 “왜 트럼프가 그런 외교를 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진짜 문제: 자유주의 패권의 붕괴와 대전략의 공백


트럼프의 비정상성은 원인이 아니라 증상에 가깝다. 미국 외교의 혼란은 이미 트럼프 이전부터 누적되어 왔다.

자유주의 패권은 단순한 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군사력, 달러 체제, 기술 혁신, 개방 시장, 동맹 네트워크가 결합된 질서 운영 모델이었다.

이 모델은 전후 수십 년간 미국의 패권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이 체계는 세 가지 구조적 균열을 맞았다. 첫째, 글로벌화의 비용이 미국 내부에 집중되면서 정치적 합의가 붕괴했다. 둘째, 중국이라는 체제 외부의 초대형 경쟁자가 기존 규칙을 활용해 부상했다. 셋째, 동맹국들은 미국의 보호 아래 성장하면서도 독자적 이해관계를 강화했다.

이 조건에서 자유주의 패권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한 ‘자동 파일럿’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대체할 완성된 현실주의 세력균형 전략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대전략의 공백이다.

트럼프 2기의 대전략 혼종성


트럼프 2기는 이 공백을 메우지 못한 채,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두 전략을 섞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자유주의 패권의 종언을 선언한다. 새 국가안보전략은 규범과 가치 대신 국익과 힘의 균형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다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러시아의 핵심 안보 우려였던 나토 동진을 명확히 중단하지 않는다. 이는 현실주의 세력균형의 기본 원칙—상대의 핵심 이익선 인정—을 위반한다. 동시에 전쟁을 질서 재편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자유주의 패권의 잔존 논리도 유지한다.

동맹 관리에서도 혼종성은 더 분명하다. 안보 공약은 유지하되, 경제 영역에서는 관세와 투자 압박을 통해 동맹국들에게 대미 투자를 강요한다. 동맹은 질서를 함께 설계하는 주체가 아니라, 거래의 상대가 된다.

이것은 세력균형도 아니고 자유주의 패권도 아니다. 가장 불안정한 중간 상태, 즉 전략적 혼종이다.

로치의 처방이 위험한 이유


로치는 이 문제의 해법을 ‘포스트 트럼프’에 둔다. 즉, 미국 정치가 정상화되면 외교도 정상화될 것이라는 기대다. 그러나 이는 세 가지 이유에서 위험하다.

첫째, 자유주의 패권의 복원 가능성은 이미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미국 내 정치 분극화와 재정 부담, 기술 경쟁의 심화는 과거로의 회귀를 허용하지 않는다.

둘째, 현실주의 세력균형으로의 전환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정교한 전략 설계와 동맹 관리, 레드라인 설정을 필요로 한다. 트럼프 이후의 미국이 이를 수행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셋째, ‘기다림’은 전선국가에게 허용되지 않는 선택이다. 미·중 관계의 안정이 미래에나 가능하다는 진단은 한국, 대만과 같은 국가에게는 전략적 공백 기간을 감내하라는 말과 같다.

우크라이나의 교훈: 혼종 전략의 비용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혼종 대전략의 시험장이 되었다. 미국은 러시아를 완전히 굴복시키지도 못했고, 안정적 타협선도 제시하지 못했다.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유럽의 부담은 누적되었으며, 핵 사용 위험은 구조적으로 상존하게 되었다.

이것이 보여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대전략이 혼종일 때, 억지는 불완전해지고 전쟁은 길어진다.

동아시아로 이동하는 위험


이 불안정성은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대만해협, 한반도는 모두 레드라인이 명확하지 않은 공간이다. 미국이 언제, 어떤 조건에서 개입하는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수록, 상대의 모험주의는 강화된다.

로치가 말하는 ‘외교의 회복’은 이 지역에서 충분한 억지를 보장하지 않는다. 정상회담과 수사적 안정은 위기를 관리하지 못한다.

한국의 결론: 자력 억지의 정치로


이 지점에서 한국의 선택은 분명해진다. 동맹은 여전히 필수적이지만, 억지의 최종 책임을 외주화할 수는 없다.

한국의 자력 억지, 그 최종 형태로서의 핵무장 논의는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이 혼종적 국제질서에 대한 구조적 응답이다. 그것은 동맹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맹이 흔들릴 때도 억지가 유지되도록 하는 질서 안정 장치다.

로치를 넘어서야 할 이유


로치의 글은 트럼프라는 인물을 정확히 비판하지만, 시대의 구조를 끝까지 따라가지 않는다. 문제는 트럼프가 아니라, 미국 패권의 전환기에 나타난 전략적 공백과 혼종성이다.

이 공백의 시대에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다. 동맹을 강화하되, 억지를 스스로 설계하고, 자체 핵무장이라는 최종 억지 수단을 준비하는 것. 이것이 자유주의 패권 이후, 현실주의 세력균형 이전의 세계에서 한국이 생존하고 질서를 만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