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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규범의 종언, ‘공간’이 권력을 삼키고 있다…그린란드에서 한반도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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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규범의 종언, ‘공간’이 권력을 삼키고 있다…그린란드에서 한반도를 읽다

미중 패권전의 승부처가 된 영향권 전략과 자원 무기화: 미국은 왜 동맹의 금기선을 넘는가…‘관리의 외교’ 끝난 자리, 한국은 스스로 선택할 능력을 가졌는가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중순에도 군사력 동원해서라도 그린란드를 100% 손에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2025년 2월 5일 그린란드 누크 항구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의 모습이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중순에도 "군사력 동원해서라도 그린란드를 100% 손에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2025년 2월 5일 그린란드 누크 항구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의 모습이다. 사진=로이터
세계는 다시 힘으로 질서를 관리하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규칙과 제도, 합의와 규범이 국제질서의 중심에 있던 시기는 저물고, 행동과 압박, 공간과 통제의 논리가 전면으로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선언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건과 선택,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이 누적되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미국을 둘러싼 그린란드 논쟁과 자원 전략, 그리고 에너지와 안보를 둘러싼 일련의 움직임은 이 변화가 이미 실행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순한 갈등의 심화가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유지되어 온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공식적인 해체다. 이제 미국은 세계 전체의 규범을 지키는 '보안관'이기를 거부하고, 자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핵심 영향권'을 선별적으로 요새화하는 '선별적 개입(Selective Engagement)'으로 선회했다.

오늘의 패권 경쟁은 단기간의 충돌로 결판나지 않는다. 그것은 장기적인 소모전이며, 그 소모전을 견딜 수 있는 구조를 누가 먼저 확보하느냐의 경쟁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자원과 에너지, 전략 공간의 통제는 군사력 못지않게 중요한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이로써 세계 질서는 다시금 영향권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으며, 그 흐름은 유럽과 동아시아, 그리고 한반도까지 연결되어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의 성격 변화와 승부의 기준


미중 패권 경쟁은 더 이상 성장률이나 시장 점유율의 경쟁이 아니다. 과거에는 누가 더 빠르게 성장하고 더 많은 기술을 확보하는지가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의 경쟁은 누가 더 많은 공간을 통제하고, 누가 상대의 행동 반경을 구조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급격하게 이동하고 있다. 이는 경쟁의 무대가 제도에서 지리로, 규칙에서 영향권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자원과 항로, 기술 표준과 금융 연결망을 결합해 독자적 질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미국이 택한 전략은 전면적 봉쇄가 아니다. 미국은 핵심 공간을 선별해 장악하고, 그 공간을 지렛대로 삼아 전체 구조를 움직이려 하고 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상대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선택지를 줄이고 행동 비용을 높이는 것이다.

그린란드는 이 같은 전략이 응축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 공간은 북극 항로와 자원, 미사일 방어와 조기경보 체계가 교차하는 요충지인 것이다. 미국이 이곳을 중시하는 이유는 단기적인 자원 확보가 아니라 장기적인 선택지를 확보하려는 데 있다. 패권 경쟁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의 물량이 아니라 내일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 구조를 선점함으로써 경쟁의 시간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정하려 하는 것이다.

영향권 정치의 귀환과 유럽 질서의 흔들림


이러한 전략 변화는 유럽 질서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 유럽은 오랫동안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에서 규칙 기반 질서의 수혜자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영향권 정치가 전면에 급부상하면서 이 구조는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린란드를 둘러싼 논쟁은 동맹이라 해도 전략적 필요 앞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이제 동맹국에 '보호'를 제공하는 대가로 더 높은 수준의 '전략적 정렬(Strategic Alignment)'을 요구하고 있다. 그린란드 사례는 미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동맹의 '주권'이라는 추상적 가치보다 '공간의 통제'라는 실체적 이익을 우선시할 것임을 보여주는 냉혹한 예고장이다.

유럽 내부에서 전략적 자율성 논의가 다시 부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미국과의 결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의 선택이 언제든 유럽의 부담으로 전가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방어적 반응이다. 동맹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동맹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향권 정치의 확산은 동아시아의 미래를 예고한다. 동맹은 보호 장치이자 동시에 압박의 통로가 되고, 중견국들은 더 이상 모호한 위치를 유지하기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힘의 정치는 침묵과 유보조차 하나의 선택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자원과 에너지가 만드는 장기전의 구조


현대의 패권 경쟁에서 자원과 에너지는 단순한 경제 변수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전쟁과 경쟁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에너지 시장은 이제 공급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의 문제로 이동했다. 물량이 있어도 제값을 받지 못하고, 팔 수 있어도 거래 조건이 악화되면 국가의 재정 여력은 빠르게 흔들린다.

이 같은 구조에서 가격은 단순한 시장 신호가 아니다. 가격은 전쟁과 경쟁의 수명을 깎는 도구다. 생산량이 유지돼도 가격이 무너지고 할인 폭이 커지면 재정은 먼저 압박을 받는다. 전쟁은 전선에서 끝나기보다 재정과 산업의 병목에서 먼저 지연된다. 자원과 에너지는 더 이상 전쟁의 연료가 아니라 전쟁을 지속하는 권력 그 자체가 된다.

그린란드와 같은 대체 공급지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당장의 물량보다 심리적 지형을 바꾼다. 대체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존 독점의 협상력은 약화된다. 패권 경쟁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행동할 때마다 더 많은 비용을 치르게 만드는 것이다.

동아시아와 한국이 직면한 전략적 질문


이런 구조 속에서 한국의 위치는 특히 어렵다. 한국은 자원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면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와 배터리, 방산 산업을 보유한 국가다. 자원 공급망의 안정성은 곧 산업 경쟁력이며, 산업 경쟁력은 안보 역량과 직결된다.

미국의 전략 변화는 한국에게 기회와 부담을 동시에 안기고 있다. 대체 공급망이 구축되면 중국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러나 자원과 안보가 결합된 블록화가 심화될수록, 한국은 더 명확한 선택을 요구받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중립은 비용이 되고, 무조건적 편승은 자율성을 잠식한다.

이제부터 한국의 과제는 단순한 편들기가 아닌 '구조적 자강(Structural Self-Reliance)'이어야 한다는 데 국내 외교안보 및 경제 담론 시장의 인식이 모아지고 있다. 이는 안보와 경제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국가 차원의 지경학적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도체 기술력과 방산 역량을 '전략적 레버리지'로 삼아, 강대국이 우리를 배제할 때 치러야 할 비용을 높이는 '상호 인질 극대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핵심 과제는 선택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구조적으로 축적하는 데 있다. 동맹은 유지하되 자동화해서는 안 되고, 자강은 고립이 아니라 협상력의 조건으로 인식돼야 한다. 경제와 안보를 분리해 사고하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위기 상황에서 선택지는 급격히 줄어든다.

결론적으로, 세계 질서는 다시 힘과 공간, 자원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그린란드에서 시작된 논쟁은 북극의 문제가 아니라, 미중 패권 경쟁의 장기전 구조를 보여주는 신호다. 이 변화 속에서 한국의 국익은 어느 편에 서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선택지를 구조적으로 보유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관리의 언어에 머무를 것인가, 준비와 구조의 언어로 나아갈 것인가. 그 선택이 한국의 미래를 가르게 될 것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