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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한미 FTA 무력화…새 협정 서명국만 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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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한미 FTA 무력화…새 협정 서명국만 우대

20년 무역보고서 AI 분석…호주·멕시코 역대 최저, 방글라데시는 급등
관세 협상 앞둔 한국, '협정 갱신 논리'에 직면
트럼프 행정부가 기존 자유무역협정국은 일반 국가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협정 갱신 논리'로 통상 외교를 재편하고 있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트럼프 행정부가 기존 자유무역협정국은 일반 국가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협정 갱신 논리'로 통상 외교를 재편하고 있다. 이미지=제미나이3
한국이 2007년부터 지켜온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프리미엄'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과 새 무역 협정을 맺은 나라만 우대하고, 기존 자유무역협정국은 일반 국가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협정 갱신 논리'로 통상 외교를 재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은 미국 정치 전문매체 더힐(The Hill)이 지난 10일(현지시각) 게재한 조지타운대학교 연구진의 기고문에 담겼다. 한미 관세 협상 테이블에서 한국의 협상력을 가늠할 핵심 변수로 급부상했다.

"550쪽 보고서, 전부 부정적"…20년 데이터가 포착한 이상 신호


조지타운대 월시 국제외교대학원의 마크 부시 교수와 기업분석 전문기관 엔터프라이즈 날리지(Enterprise Knowledge)의 저스틴 그로스먼 연구원은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각) 공개한 '2026년 해외 무역장벽 보고서'를 인공지능(AI) 기반 자연어 처리(NLP) 기법으로 정밀 해부했다.

올해로 41번째를 맞은 이 보고서는 550쪽 가까운 분량으로, 63개 교역 상대국의 대미 수출 장벽을 빠짐없이 기록한다.

연구진은 수천 개의 문장을 직접 분류해 인공지능 모델을 훈련시킨 뒤, 2007년부터 2026년까지 20년치 1251개 국가·연도별 항목에 각각 점수를 매겼다.

점수 체계는 -1(가장 부정적)에서 +1(가장 긍정적)이며, 모델 정확도는 90%에 가까운 수준이다.

분석 결과는 충격적이다. 부시 교수는 "2026년 보고서는 20년 데이터 가운데 국가 간 점수 편차가 가장 좁았다"며 "미국이 교역 상대국을 묘사하는 언어가 갈수록 획일화되고 있고, 그 언어는 분명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의 공식 언어가 동맹과 적을 가리지 않고 모든 나라를 잠재적 경쟁자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오래된 협정은 효력 없다"…新협정 서명 여부가 유일한 기준


분석에서 두드러진 첫 번째 패턴은 이른바 '협정 효과'다.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무역협정'에 서명한 9개국은 보고서 점수가 뚜렷하게 올랐다. 반면 협정을 맺지 않은 46개국의 점수는 일제히 떨어졌다.

엘살바도르와 말레이시아는 협정 체결 뒤 점수가 음수에서 양수로 뒤집혔고, 아르헨티나도 올해 2월 협정 이후 같은 흐름을 탔다. 상호무역협정을 맺은 모든 나라의 점수가 예외 없이 올랐다.

더 날카로운 함의는 두 번째 패턴에서 나온다. 전통적인 자유무역협정 우대 효과가 사실상 소멸했다는 점이다.

그로스먼 연구원은 "오랫동안 자유무역협정 체결국은 미국의 무역보고서에서 확실한 우대를 누렸지만, 2026년에는 자유무역협정 체결국과 비체결국의 점수 차가 사실상 0으로 수렴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인 수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2005년부터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유지해 온 호주는 이 보고서 역사상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 회원국인 멕시코도 역대 최저 점수로 내려앉았다.

두 나라 모두 트럼프 행정부의 새 상호무역협정에는 서명하지 않은 상태다. 반면 기존 자유무역협정 체계 밖에 있던 방글라데시는 상호무역협정 체결 뒤 2023년 대비 가장 큰 폭으로 점수가 올라 양수 구간에 진입했다.

부시 교수는 이 현상에 대해 "일부의 경우 협정 체결이 실질적인 장벽 제거를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변화의 균일성과 크기를 보면 이 보고서가 외교 성적표로 기능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엔 뼈아픈 경고…“협정 갱신 없으면 언제든 강등”


이 분석은 현재 한국의 처지를 돌아보게 한다. 한국은 2012년 발효된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토대로 대미 교역의 기초를 쌓아왔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이 협정이 트럼프 행정부 아래에서는 사실상 빈 껍데기가 될 수 있음을 수치로 보여준다.

실제로 한국은 지난해 상호관세 협상 과정에서 25%였던 관세율을 15%로 낮추는 대가로 3500억 달러(약 519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1월 한국 국회가 무역 합의를 입법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세를 25%로 다시 올리겠다고 압박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8월 발표한 '미국 관세정책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트럼프 정부의 공격적 관세정책이 2025년과 2026년 한국 성장률을 각각 0.45%포인트, 0.6%포인트 낮출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로스먼 연구원은 "과거의 무역 질서는 시장 개방과 우호적 대우의 교환이라는 단순한 논리 위에 성립했지만, 그 거래는 이제 유효하지 않다"며 "워싱턴의 신뢰 통화는 바뀌었다.

몇 년 전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느냐가 아니라, 현 행정부 아래서 새롭게 약속을 갱신했느냐가 기준"이라고 강조했다.

워싱턴 무역·관세 레터는 2026년 USTR 보고서가 단순히 장벽을 나열하는 목록이 아니라, 관세를 지렛대로 삼은 협상 전략의 공식 근거 자료로 기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이 새 협정 없이 기존 자유무역협정에만 기댈 경우, 언제든 호주·멕시코처럼 역대 최저 평가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