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15년 만의 공동개입…일본의 미 국채 매각 차단
엔화·미 국채금리·달러 체제 동시에 떠받친 승부수
엔화·미 국채금리·달러 체제 동시에 떠받친 승부수
이미지 확대보기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은 베선트 장관이 헤지펀드 시절 쌓은 외환시장 경험을 활용해 일본 엔화를 부양하는 동시에 미국 국채금리 상승을 억제하려 하고 있다고 5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다.
미국과 일본은 지난달 31일 엔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을 막기 위해 외환시장에 공동 개입했다. 미국이 일본과 함께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은 2011년 이후 처음이다.
미국 재무부는 달러가 아닌 유로를 매도하고 엔화를 매수했다. 일본도 엔화를 사들이며 보조를 맞췄다. 공동개입이 공개된 뒤 엔화 가치는 상승했다.
그러나 미국이 이례적으로 다른 선진국 통화의 가치 상승을 지원한 배경에는 일본 경제만이 아니라 미국의 재정과 국채시장 상황도 자리 잡고 있다.
◇ 파운드 공격하던 승부사, 엔화 방어자로
베선트 장관은 외환시장의 공격과 방어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다.
그는 20대 후반 조지 소로스, 스탠리 드러켄밀러가 이끌던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에서 근무했다. 당시 이들은 영국 정부가 경제 여건과 맞지 않는 높은 파운드화 가치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파운드화 하락에 대규모 자금을 걸었다.
1992년 영국이 유럽환율메커니즘에서 탈퇴하고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소로스펀드는 약 10억달러(약 1조4343억원)의 수익을 거뒀다. 이 거래는 이후 영국 중앙은행을 무너뜨린 투자로 불렸다.
베선트 장관은 1997∼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도 소로스펀드에서 경험했다. 그는 당시 위기가 지나치게 약한 엔화에서 일부 촉발됐다고 평가해왔다.
약 30년이 지난 현재 베선트 장관은 외환시장 불균형에서 수익을 얻는 투자자가 아니라 통화 불안을 막아야 하는 미국 재무장관이 됐다.
그는 1989년 이후 일본을 50∼60차례 방문했고 일본은행 총재와도 15년 이상 알고 지낸 것으로 전해졌다. 과거 대규모 외환 거래를 설계한 경험과 일본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가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조 브루수엘라스 RSM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베선트 장관은 다른 재무장관이나 중앙은행 총재보다 엔화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며 “투자자들도 당분간 그의 과감한 시장 개입을 지켜볼 의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 일본의 미 국채 매각 막아라
포춘에 따르면 미국이 엔화 방어에 나선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이 세계 최대의 미국 국채 보유국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약 1조1000억달러(약 1577조7300억원)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엔화가 계속 급락하면 일본 정부가 시장 개입에 필요한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보유한 미 국채를 대량 매각할 가능성이 있다.
미 국채 매도가 늘면 국채 가격은 하락하고 금리는 상승한다. 이미 막대한 국가부채와 높은 금리로 부담을 안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국채 매각을 피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40조달러에 접근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100%를 웃도는 규모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지난달 29일 기준금리를 동결한 뒤 미국 30년 만기 국채금리는 2007년 이후 최고 수준으로 상승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미 국채를 팔아 엔화 매입 자금을 마련하면 미국 정부와 기업, 가계의 장기 자금조달 비용이 더욱 높아질 수 있다.
브루수엘라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베선트 장관이 “국채 수익률을 낮추고 달러를 지지하며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일본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고 평가했다.
미 재무부가 달러 대신 유로를 매도해 엔화를 매수한 방식에도 이런 판단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면서도 미국 국채와 달러 시장에 직접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베선트 장관은 일본의 정책과 경제 기초여건을 낙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일부 경제학자들은 일본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환율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비판했다.
◇ 중국은 줄이고 일본은 유지한 미 국채
미국 국가부채를 떠받치는 해외 자금의 구성도 이번 개입의 중요성을 키웠다는 분석이다.
지난 2월 기준 외국인 투자자가 보유한 미국 국채는 약 9조5000억달러(약 1경3625조8500억원)에 달했다. 해외 투자자의 미 국채 매입은 미국 정부가 막대한 재정적자를 충당하는 데 필요한 자금원이다.
과거 미국의 최대 해외 채권국이었던 중국은 미 국채 보유액을 지속해서 줄이고 있다.
중국의 미 국채 보유액은 2013년 11월 약 1조3200억달러(약 1893조2760억원)로 정점을 찍은 뒤 약 6930억달러(약 993조9699억원)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중국은 일본, 영국에 이어 세 번째 해외 보유국으로 내려갔다.
반면 일본은 미국 국채 최대 보유국 자리를 유지해왔다. 일본의 미 국채 보유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지정학적 수단이라기보다 미일 동맹과 일본 수출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운용한 결과에 가깝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의 국채 수요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일본마저 보유량을 줄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엔화 방어는 일본 금융시장 안정뿐 아니라 미국 국채의 최대 해외 구매자를 지키는 조치인 셈이다.
◇ 엔화 약세는 달러 체제의 또 다른 균열
포춘은 엔화 약세 문제가 미국 국채시장을 넘어 달러 중심의 국제금융 체제와도 연결돼 있다고 분석했다.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배경에는 해외 중앙은행과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를 안전자산으로 보유하는 구조가 있다.
1974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구축한 이른바 페트로달러 체제도 달러의 지위를 뒷받침해왔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를 달러로 거래하고, 벌어들인 자금을 미국 자산에 투자하는 대신 미국이 안보를 보장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의 불안은 미국이 원유 수송의 안전을 보장하는 능력을 시험하고 있다.
일부 선박이 위안화로 비용을 지급하고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보장받았다는 보도도 나왔다. 도이체방크는 이런 움직임이 페트로위안 체제의 초기 징후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호르무즈 해협의 불확실성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엔화까지 급격히 약세를 보이면 달러 중심 국제금융 질서의 불안이 더 커질 수 있다.
미국이 엔화 방어에 나선 것은 일본 통화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미국 국채 수요와 달러의 신뢰를 함께 유지하려는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 “개입으로 일본의 정책 문제 못 고쳐”
시장 개입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미국 재무부에서 약 40년간 근무한 마크 소벨은 “현재 엔화 시장이 무질서한 상태가 아니며, 엔화 약세는 일본의 일관되지 않은 거시경제 정책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환율 개입으로 일본의 재정과 통화정책 사이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소벨은 베선트 장관의 목적이 미국 국채금리 상승을 막는 데 있다면 외환시장 개입보다 미국 정부가 세입 확대나 지출 축소를 통해 재정건전성을 개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
환율시장에서 엔화를 사들이더라도 일본의 재정적자, 금리정책, 장기 성장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엔화 약세 압력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
베선트 장관의 과거 성공을 현재 정책의 정당성으로 연결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도 담겨 있다. 헤지펀드는 통화의 잘못된 가격을 찾아 수익을 얻으면 되지만, 정부는 시장 개입에 따른 비용과 장기적인 정책 신뢰까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 자유시장보다 국가 개입 앞세운 새 질서
브루수엘라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베선트 장관이 시장 개입에서 폭넓은 재량을 인정받는 배경으로 미국 경제정책의 틀이 바뀌었다는 점을 들었다.
1990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진 자유시장과 세계화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 국가가 통화, 무역, 산업에 직접 개입하는 대중주의적 정책 체제로 이동했다는 설명이다.
이번 엔화 매수도 시장에 환율 결정을 맡기기보다 미국의 재정과 동맹, 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부가 직접 가격 형성에 개입한 사례다.
베선트 장관은 과거 정부와 중앙은행이 유지할 수 없는 환율 수준을 찾아 공격하는 투자자였다. 현재는 같은 시장 감각을 이용해 정부가 원하는 환율과 금리 수준을 방어하고 있다.
미·일 공동개입은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는 데 우선 성공했다. 그러나 개입 효과가 지속될지는 일본의 경제정책과 미국의 재정 상황에 달려 있다.
엔화를 사들이는 것만으로 40조달러에 육박한 미국 국가부채와 상승하는 국채금리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베선트 장관에게 이번 조치는 엔화, 미국 국채,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하나의 거래로 방어하려는 승부수라는 평가다. 헤지펀드 시절 통화를 공격해 수익을 냈던 베선트가 이제는 미국의 부채와 동맹을 지키기 위해 외환시장 반대편에 섰다는 분석이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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