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순다르 피차이는 실리콘밸리 거물 가운데 가장 이름이 덜 알려진 인물이다. 일론 머스크처럼 소셜미디어를 뒤흔들지도 않고, 젠슨 황처럼 가죽 재킷을 무대 의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회사는 전 세계 수십억 명의 하루를 움직인다. 검색, 지메일, 지도, 유튜브, 안드로이드, 크롬이 모두 그의 손 아래 있다. 화려한 언변 대신 묵묵한 실행으로 세계 최대 정보기업을 지휘해 온 인물, 그것이 피차이의 본모습이다.
피차이는 1972년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 마두라이에서 태어났다. 집에는 냉장고도 전화기도 변변치 않았다. 전화가 처음 들어왔을 때 번호를 모조리 외워버렸다는 일화는 지금도 그의 비상한 기억력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회자된다. 인도공과대학(IIT) 카라그푸르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그는 장학금을 받아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재료공학 석사를 마쳤고, 이어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다. 공학과 경영을 모두 체득한 이력은 훗날 기술과 사업을 동시에 읽어내는 그의 경영 스타일의 바탕이 됐다.
그가 구글에 입사한 것은 2004년이다. 처음 맡은 일은 구글 툴바의 제품관리였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브라우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구글 검색은 남의 집 안방을 빌려 쓰는 처지였다. 피차이는 구글이 자체 브라우저를 가져야 한다고 경영진을 설득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크롬이다. 크롬은 출시 몇 년 만에 세계 1위 브라우저로 올라섰고, 피차이의 이름도 사내에서 빠르게 부각됐다. 이후 그는 안드로이드 사업까지 넘겨받았고, 그가 안드로이드를 맡은 이듬해 구글은 10억 대가 넘는 기기에 안드로이드를 탑재하는 기록을 세웠다.
2015년 구글이 지주회사 알파벳을 세우며 조직을 재편하자 창업자 래리 페이지는 구글 본체의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피차이에게 넘겼다. 43세의 나이였다. 2019년에는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면서 알파벳 CEO까지 겸하게 됐다. 창업자가 아닌 전문경영인이, 그것도 인도 출신 이민자가 세계 최고 기술기업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그의 CEO 시절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시련은 2022년 11월 오픈AI의 챗GPT 등장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생성형 AI의 뼈대인 트랜스포머 기술을 처음 발표한 곳은 구글이었다. 구글 내부에는 이미 람다(LaMDA)라는 대화형 AI가 있었다. 그러나 검색 수준의 안전성과 신뢰도를 요구하는 내부 기준 탓에 세상에 내놓지 못했다. 그사이 신생 기업이 먼저 판을 깔았다. 시장은 냉혹했다. "검색의 시대는 끝났다", "구글이 AI 전쟁에서 졌다"는 평가가 쏟아졌고, 알파벳 주가는 한동안 맥을 추지 못했다. 피차이에게 "평시의 CEO일 뿐 전시의 CEO는 아니다"라는 비판도 따라붙었다.
피차이의 대응은 그다운 방식이었다. 요란한 반격 선언 대신 조직부터 정비했다. 흩어져 있던 AI 연구 조직인 구글 브레인과 딥마인드를 하나로 합쳤고, 크롬·안드로이드·픽셀 등 제품 조직도 재편했다. 그 결과물이 제미나이다. 출발은 더뎠지만 제미나이 2.5에 이르러 구글은 최첨단 모델 경쟁에서 정상급 성능을 입증했다. 이미지 생성 기능 '나노 바나나'는 출시 직후 폭발적 반응을 얻으며 구글의 부활을 알렸다. 무엇보다 구글은 제미나이를 검색, 지메일, 안드로이드 등 이미 수십억 명이 쓰는 서비스 깊숙이 심었다. 소비자가 굳이 새 앱을 깔지 않아도 구글의 AI를 쓰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투자 규모도 상상을 뛰어넘는다. 피차이는 2026년 한 해 설비투자로 1,750억~1,850억 달러를 집행하겠다고 밝혔다. 자체 개발한 AI 칩 TPU, 거대한 데이터센터, 최고급 AI 인재 확보에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그는 지금 AI 산업의 진짜 제약이 돈이 아니라 반도체 웨이퍼와 고대역폭메모리(HBM), 전력 같은 물리적 공급이라고 진단한다. 구글 내부 업무 방식도 달라졌다. 피차이는 올해 구글 클라우드 넥스트 행사에서 구글에서 새로 작성되는 코드의 75%가 AI로 생성된 뒤 엔지니어의 검토를 거친다고 공개했다. 엔지니어가 코드를 직접 짜는 사람에서 AI 에이전트를 지휘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성과는 숫자로 드러난다. 미국 경제지 배런스에 따르면 챗GPT 등장 이후 알파벳 주가는 270% 올라 S&P500 지수 상승률의 세 배에 이르렀다. 한때 AI 시대의 패배자로 거론되던 기업이 검색 광고의 아성을 지키면서 AI 인프라와 모델을 모두 갖춘 '풀스택 AI 기업'으로 거듭난 것이다.
피차이는 조국 인도와의 인연도 놓지 않는다. 올해 인도 AI 임팩트 서밋에서 그는 학창 시절 첸나이에서 기차를 타고 카라그푸르로 통학하던 기억을 꺼내며, 그 길목의 도시 비사카파트남에 150억 달러를 들여 AI 거점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가난한 소년이 기차 창밖으로 바라보던 도시에 세계 최대 기술기업의 AI 허브가 들어서는 셈이다.물론 과제도 만만치 않다. 미국과 유럽의 반독점 소송, 개인정보 보호 논란, AI가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사회적 불안, 그리고 오픈AI·앤트로픽·메타 등과의 끝없는 경쟁이 그의 앞에 놓여 있다. 막대한 AI 투자가 거품이 아니냐는 의구심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피차이가 보여준 리더십은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위기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큰 목소리가 아니라 정확한 판단과 흔들림 없는 실행이라는 점이다. 그는 AI를 "우리 생애 가장 큰 플랫폼 전환"이라 부른다. 마두라이의 작은 집에서 전화번호를 외우던 소년은 이제 인류의 정보 질서를 다시 쓰는 자리에 서 있다. 조용한 사령관의 다음 수가 세계 기술 패권의 향방을 가를 것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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