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 전 신자유주의의 폭풍이 인도를 휩쓸었을 때, 인도 공공 부문의 산업은 가장 먼저 정면으로 타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인도의 수백 개 공공 기업들은 자산 고갈을 해결하기 위해 민영화로 전환됐다. 항만, 해운 및 조선 산업을 비롯해서 공항과 항공, 철도, 석유와 가스 추출 산업, 그리고 석유화학, 정유, 통신네트워크, 철도네트워크 등도 민영화 작업에 포함됐다.
중장비와 전기 장비, 호텔, 발전과 유통, 대형보험회사, 공공 은행 등의 거대한 네트워크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보루였던 대형 국영 제철소도 흔들리고 있었다.
30년간 진행되어 온 신자유주의 기간 동안, 인도는 거대 자본의 요청으로 공공 부문의 기업을 약화시키기 위해 지속적이고 악의적인 공세가 진행됐다. 이 공세는 신자유주의 진영이 바라던 것만큼 순조롭거나 생산적이지 않았다.
인도의 노조화된 노동계급은 크든 작든 간에 민영화를 향한 모든 움직임에 맞서 싸웠다. 결과는 실패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인도 정부가 수십 개의 공공기업을 민영화하거나 폐쇄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큰 단위의 철강공장 등은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아직 공공 부문에 남아 있다. 인도 노동계급과 대자본 사이의 이러한 투쟁은 인도 국가 당국의 중재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적 교훈을 만들었다.
비사카파트남 제철소 이야기는 양보 없는 투쟁의 중요한 예이다. 인도 남동부 안드라프라데시주의 항구도시인 비사카파트남 벵골만 해안에 위치한 비사카파트남 제철소는 인도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회사명칭을 라슈트리야 이스팟 니감 유한회사(RHISTRIYA Ispat Nigam Limited, RINL)로 명명했다. 그리고 인도 산업계를 대표하는 인도의 자부심으로 등장했다.
비사카파트남 제철소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도 사회를 현대화 하는 일등 공신이었다. 바사카파트남 제철소는 공공부문 산업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인도인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런 주변의 상황들이 제철소가 공공기업으로 생존하는 이유로 충분했다.
비사카파트남 제철소는 1982년 민간의 뜻에 따라 탄생했다. 이 독특한 제철소는 여러 차례의 민영화 시도를 극복하면서 번성해 왔다. 그런 과정에서 인도 정부는 비사카파트남 제철소를 민영화하기 위해 서로 다른 시점과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기초한 다양한 경로로 돌파구를 찾아왔다.
공장이 취약할 때는 투자를 철폐하거나 개별 부서의 민영화를 시도하면서 자산 매각을 추진하려고 했다. 공장이 튼튼할 때는 자원과 정책적인 사항들을 앞세워 사보타주, 권한 거부, 중요한 비즈니스 의사 결정 지연 등의 문제 등을 야기시켰다. 민영화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실행으로 보여주었던 셈이다.
이러한 민영화의 모든 시도는 시민운동과 철강 공장을 위해 싸운 지역의 사람들, 그리고 제철소의 노동자들에 의해 성공적인 방어를 이루었다.
◇인민철강공장에 대한 포부
인도는 2세기 동안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무자비한 착취와 자원, 그리고 활력을 빼앗겨 오면서 1947년 독립을 선언했다.
인도의 급속한 현대화와 산업화는 새롭게 형성된 국가 이전에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였다. 비록 저개발 되고 있는 현실과 광범위한 빈곤, 빠듯한 외환 상황, 그리고 기술적 후진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인도는 야심찬 산업화 프로젝트에 착수했고, 경제의 현대화와 확장에 필요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공업체들을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인도는 소련과 여러 다른 나라들의 도움으로, 철강공장, 정유공장, 광산, 발전소, 그리고 중공업장비, 전기장비, 국방장비, 의약품 생산 산업체들을 세웠다. 대부분 공기업으로 설립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들 중에서, 철강공장 설립은 인도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였다. 철강 생산의 자립은 인도의 대규모 철도망 건설뿐만 아니라 항구개발, 중공업건설, 수백만 에이커의 메마른 땅에 운하(물)를 공급하는 대규모 관개 프로젝트 건설 등에 필수여서 인도 현대화의 중심을 이루었다.
인도인들에게 강철은 철 그 이상이었으며, 철강 공장은 인도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인도 북쪽과 동쪽의 철 벨트에 세워진 제철소들은 남쪽의 인도인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수천 에이커의 땅에 세워지는 거대한 제철소가 새로운 인도를 건설해 나가는 역할을 하게 되자 제철소를 마치 신전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대했다.
제철소가 창출한 고용효과와 그 주변에서 생겨난 보조 산업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어서 비사카트남이 소재한 안드라프라데시 주민들은 제철소 건설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1965년 당시 총리였던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가 이끄는 인도 정부는 남인도의 철강공장을 선정하기 위해 참여한 영미 컨소시엄의 권고에 따라 비사카파트남에 인도 최초의 해안기반의 철강공장을 설립할 의사를 발표했다.
이것은 분열되지 않은 안드라프라데시에서, 특히 현대적이고 산업적인 고용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에게 환희의 도화선이 되었다.
비록 번화한 항구 도시이지만, 비사카파트남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들 중 하나에 위치해 있다. 당시 안드라프라데시주 북부 비사카파트남 주변 지역은 산림 부족 인구가 많은 빈곤층이 주를 이뤘다.
이 지역은 기아, 질병, 영양실조로 가득 차 있었다. 수천 명은 이미 전염병으로 전멸했다. 비사카파트남에서 운영되고 있었던 기존의 공공산업들은 이 지역 사람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것에 비해 통합 제철소는 훨씬 더 큰 고용 풀과 훨씬 더 큰 발전을 의미했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에게는 충분히 기뻐할 명분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인디라 간디 당시 총리가 1966년 자금 부족을 이유로 제철소 설립 약속을 철회하자, 인도인들의 환호는 극심한 실망과 분노로 바뀌었다. 서로 다른 입장과 변심으로 중앙 정부는 남부 인도 주들 사이에서 제철소 건설 유치를 위한 일종의 투쟁을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남부지역에서는 차별과 무시의 불만을 터뜨렸다. 안드라 프라데시 사람들은 분노로 반응했고 철강 공장 유치를 위한 전투는 물밑에서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계속>
김종대 글로벌철강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