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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건축이야기(12)] 폼베이 제철소가 생산한 주철로 만들어진 324m의 에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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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건축이야기(12)] 폼베이 제철소가 생산한 주철로 만들어진 324m의 에펠탑

프랑스 파리의 상징물 에펠탑.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프랑스 파리의 상징물 에펠탑. 사진=로이터
지난 5월 6일은 파리의 상징 에펠탑이 세인트 강변에 공개된 지 13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에펠탑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프랑스와 파리의 랜드마크가 된 지 오래다.

에펠탑은 프랑스 엔지니어 구스타브 에펠이 설립한 금속골조구조물 전문회사 에펠주식회사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2년 2개월 5일만(1887년 1월 말~1889년 3월 31일)에 건설한 놀라운 건축물이다.. 당시로서는 어느 것과도 비교할 없는 위대한 업적이다.
에펠탑 건설의 주역 구스타브 에펠은 포르투 고가교(포르투갈), 가라비트 고가교(프랑스), 부다페스트 기차역(헝가리) 등 유럽에 있는 많은 금속 구조물을 건설한 베테랑 건축가였다. 이미 철 구조물 건설로 유명세를 얻은 인물이다.

그의 명성이 대중에 알려진 것은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다. 프랑스 파리 근교 레발루아 페레에 위치한 구스타브 에펠의 회사는 프랑스가 1886년 미국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으로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 구조물을 맡고 디자인은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했다.

철 이야기에 에펠탑을 거론하는 이유는 과연 에펠탑의 재료가 구체적으로 어떠하기에 134년이 지나도록 끄떡없냐는 호기심 탓이다.

강철이 아닌 퍼들철로 만들다


에펠탑의 재료는 강철이 아니라 주철(puddle iron)이다. 프랑스 동부의 폼베이(Pompey) 제철소에서 생산된 주철은 총 7000톤 이상으로, 에펠탑을 위해 정확히 1만8038개의 철 부품을 만들었다.

폼페이 제철소는 1850년 '포지스 다르 쉬르 모젤(D'Ars-sur-Moselle) 듀퐁과 드레퓌스'를 말한다. 이 회사는 1870년~71년 프랑스와 프로에센 전쟁을 겪고, 1872년 포지스 다르쉬르 모젤 공장을 폼페이우스로 이전했다. 1874년~1875년 2개의 용광로 공장을 건설했다. 듀퐁 폴드 단조 라미노아의 이사회 의장은 미쉘이었다.

이 회사는 1900년 제3 고로가 시운전되고 1901년 1월 4개의 용광로 중 2기는 불이 꺼져 있었다. 1902년 머츨러 구스타브 엔지니어가 폼베이우스에 영입되면서 1905년 제4고로 시운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53년 소시에테 데 아씨에리 드 폼페이(SAP)는 LD-폼페이 프로세스를 개발했다. 그러나 1968년 파산을 신청한 이후 SAP는 폼페이의 새로운 SNAP(Société nouvelle des aciéries de Pompey)가 되었다. 결국 1986년에 모든 공장의 활동은 멈췄다. 이 회사는 1889년부터 파리에 있었지만 에펠탑의 철은 그랑 에스트 지역, 더 정확하게는 로렌의 낭시 근처에서 시작된 것이다.
에펠탑 기둥에 부착된 시그니처. 폴드 듀퐁 단조 플레이트 세테 / J.슐리히터.이미지 확대보기
에펠탑 기둥에 부착된 시그니처. 폴드 듀퐁 단조 플레이트 세테 / J.슐리히터.


1887년 구스타브 에펠은 1889년 만국박람회의 중심을 이루는 에펠탑을 짓기 위해 7000톤 이상의 철이 필요했다. 에펠은 철을 확보하느라 입찰 공고를 냈다. 그 결과 뫼르테-에-모젤에 있는 폼페이의 폴드-듀퐁 대장간이 낙찰을 받았다. 폼페이의 용광로, 단조와 제철소에서는 에펠탑 건설에 필요한 모든 철을 공급할 수 있었다. 가공되기 이전까지의 광석은 광석 생산현지에서 직접 추출되었다. 에펠탑을 위해 폴드-듀퐁 대장간은 정확히 1만8038개의 철을 생산했다. 이들의 ‘시그니처’ 플레이트는 지금도 에펠탑의 기둥에 부착되어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당시의 철 제조과정을 보자. 우선 쇳물이 그릇(웅덩이)에 고여 부품이 형성되면 쇳물은 구스타브 에펠의 작업장이 있던 파리 근교의 레발루아-페레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사전 조립 공정이 진행되었다. '레발루아-페레' 작업장에서 도착한 부품은 샹드마르에서 극한상황의 철재로 준비되었다.

더 이상 구멍을 뚫거나 조정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의 리벳이 제자리에 구축할 수 있었다. 건축물의 구성 요소는 변경 없이 서로 맞물려 있었다. 구스타브 에펠은 그의 저서 '라 투르 드 300미터'(300미터 타워)에서 폴드-듀퐁이 납품한 아이언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이 공장은 아이언 제조에 최선을 다했다. 아무런 결함도 없는 아이언만을 만들었다. 1887년 6월부터 1889년 3월까지 한 달에 평균 300~400톤씩 작업장에서 생산했다. 공방에서 납품한 철재만 해도 6360톤이었다. 이것은 리벳과 부속 부품의 무게를 제외한 것이다. 실제 에펠탑의 무게는 7300톤에 달한다. 조립식 공법으로 에펠탑은 단 2년 2개월 만에 완성됐다."

주철은 철광석을 환원시켜 용광로에서 생산된 상태에서 주철에 남아 있는 잉여 탄소를 제거하는 퍼들링(puddling) 작업으로 정제된 것 즉, 퍼들 아이언을 말한다. 퍼들 아이언은 거의 순수한 철이다. 이 철을 소재로 가볍고 강력한 구조물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리벳으로 쉽게 조립할 수 있는 L자형이나 I형의 플레이트 또는 프로파일로 롤링할 수 있다는 계산을 에펠 팀이 실현한 것이다.

파리의 에펠탑이 탄생하기 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1,000피트(약 300미터) 높이의 탑을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이 업적을 먼저 이루어낼 수 있었던 공적은 사실 에펠이 아니다. 그의 회사에서 근무하는 두 명의 엔지니어가 설계한 작품이다. 에펠은 이 직원들에게 15년 치에 해당하는 연봉을 주고 설계도의 지적재산권을 확보했다.

철의 여인, 에펠탑을 건립하면서 숱한 악의적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시인 폴 베를렌은 '종루의 뼈대'라고 묘사했다. 작가 레옹 블루아는 '진정으로 비극적인 가로등'이라고 혹평했다. 이런 혹평은 파리만국박람회 방문객이 2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자 단숨에 사라졌다.

싸이 강남스타일 공연에 2만명 운집


에펠탑에서는 갖가지 행사가 열린다. 7월 14일 '바스티유의 날'에 열리는 장엄한 불꽃놀이, 국가적 차원의 행사, 대규모 스포츠 등 수많은 이벤트들이 에펠탑을 배경으로 열린다. 강남스타일로 유명세를 탄 가수 싸이의 파리 에펠탑 공연에서는 2만 명이 운집했다.

324m 높이로 솟은 에펠탑은 정해진 시간에 반짝이는 조명과 360도로 80㎞까지 뻗어나가는 봉화 덕분에 파리 전역은 물론 그 너머에서도 새벽 1시까지 낮과 밤에 볼 수 있다.

에펠탑은 프랑스의 화려하고 비극적인 중요한 사건들을 지켜본 목격자이다. 초기에 에펠탑은 과학 실험, 특히 무선 전신 실험을 위한 생산적인 실험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에펠탑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기술 발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에펠탑 정상에 설치된 TDF 설비와 송신기는 일 드 프랑스에 거주하는 1200만 명의 주민들에게 모든 디지털 지상파 텔레비전과 라디오 채널을 방송한다.

오늘날 에펠탑의 조명은 전 세계에서 일어난 극적인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밤에는 소등된다. 에펠탑은 상징을 넘어 파리와 프랑스 전역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파리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의 필수 코스인 에펠탑에는 매년 600만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올라갔다. 에펠탑은 매일, 그리고 야간에도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11시 45분까지, 여름에는 오전 9시부터 12시 45분까지 개장한다.

프랑스 첫 삽화엽서는 에펠탑


에펠탑은 1층, 2층, 정상 등 총 3개 층이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2층은 정상과 마찬가지로 2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아래층은 밀폐된 공간, 위층은 개방된 공간). 방문객들은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처음 두 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2층에서 정상까지 올라가는 것은 엘리베이터로만 가능하다. 1층 라운지를 형성하는 골조에는 "엘마 당신을 사랑해"라는 낙서가 쓰여진 것을 필자는 목격했다. 아마 지금은 새로운 페인팅으로 지워졌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제작된 첫 삽화 엽서의 앞면을 장식한 것은 에펠탑의 초상화였다. 작가의 이름을 딴 리보니(Libonis) 엽서는 에펠탑 2층 우체국에서 제작됐다. 초판에 총 30만 부를 발행했다.

에펠탑에는 1만8038개의 철 부품이 사용됐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에펠탑에는 1만8038개의 철 부품이 사용됐다. 사진=로이터


당초 파리 만국박람가 끝나면 철거가 예정되었던 에펠탑은 20년 후 철거하도록 계약되었다. 에펠탑 건설 초기에 에펠이 건축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20년 동안 관람 판매 수익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계약 때문이다.

에펠탑 개관 초기의 방문객들은 1710개의 계단을 직접 올라야 했다. 얼마 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두 대의 엘리베이터는 지금도 이용된다. 2014년에 마무리된 보수 공사에서도 수력을 이용한 운영 방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철의 단점은 녹이 슨다는 점이다. 견고한 페인트가 없었다면 철로 만들어진 에펠탑은 그 수많은 세월을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에펠탑이 지어진 이후 총 19번의 도색이 이루어졌다. 평균 7년마다 한 번씩 페인트칠을 새로 한 셈이다. 1968년 이후 에펠탑 도색작업에는 '에펠탑 브라운' 페인트가 사용되었다.

에펠탑을 흉내 낸 구조물들이 세계 곳곳에 세워졌다. 1894년 영국에 블랙풀 타워가 세워진 이래로, 러시아, 중국, 루마니아 등에 에펠탑을 본뜬 구조물들이 세워졌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에펠탑이 가장 유명하다. 높이는 165m이다.

에펠효과 현대적 광고에 적용


에펠탑에서는 매일 밤, 길이 80㎞의 광선이 마치 밤의 등대와 같이 파리 전체를 비춘다. 에펠탑이 쏟아내는 파란색-흰색-빨간색 빛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빛이다.

에펠효과라는 신조어도 탄생했다. 한 대상에 대한 감정이 처음에는 싫어하거나 무관심에 가까웠지만, 자주 접하게 되면서 호감도가 높아지고 거부감도 사라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기업들은 이 에펠탑 효과를 주로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 TV나 신문 등을 통해 제품을 소비자에게 자주 노출함으로써 인지도와 함께 호감도도 높이려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자연스럽게 제품을 홍보하는 PPL 등도 바로 이런 '에펠탑 효과'를 노린 홍보 전략 중 하나다. 최근에 에펠탑이 심하게 녹슬었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관광수입 때문에 파리시 측은 이를 무시하고 새롭게 칠을 했다는 보도가 있다.

에펠탑 1층을 감싸고 있는 밴드에는 72명의 과학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에펠탑의 1층은 넓고 연속적인 빔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곳에 구스타브 에펠은 60cm 높이의 금색 대문자로 과학자들의 이름을 새겼다. 지상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만큼 크다. 이 중 18개는 각 면에 무작위 순서로 새겨져 있다.

등재된 인물들은 모두 1789년에서 1889년 사이에 프랑스에 거주하며 활동한 프랑스인이었다. 1896년에 사망하여 빛의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한 히폴리트 피조만 제외하고는 모두 에펠탑이 개관할 무렵에 사망했다. 화학자 셰브르는 1889년 4월 9일 10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태어난 사람은 지리학자이자 수학자인 페리에 장군으로 1833년에 태어나 1888년에 사망했다.

72명의 과학자 이름 각인


이름 중에는 과학의 판테온 암페르나 게이-루삭과 같은 과학자, 플라샤트나 폴론소 같은 엔지니어와 건축가, 페르도네나 클라페용 같은 철도 전문가, 철강의 슈나이더나 시멘트의 비캇과 같은 산업가들이 있다. 그리고 세갱(현수교 전문가), 트리거(강 기초 전문가), 카일 또는 구인(에펠의 경쟁자), 벨그랑(파리 위생 시스템 책임자)과 같은 개발자 등 계약자와 산업가. 모든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이 72명의 이름 중에는 여성이 없다.

저명한 과학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왕관(?)을 쓴 에펠탑은 일종의 과학적 판테온이 되어 건축과 산업기술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의 힘을 기념하고 있다.


김종대 글로벌철강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