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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다리이야기(13)] 미국 파견 보빙사의 시작부터 압록강 철교 건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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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다리이야기(13)] 미국 파견 보빙사의 시작부터 압록강 철교 건설까지

압록강 철교.이미지 확대보기
압록강 철교.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고종은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주한공사를 상주시키자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조선에서도 미 워싱턴에 조선전권공사를 파견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은 보빙사를 보낼 만큼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 이를 알아차린 주미공사 '푸트’는 고종에게 견미(遣美)사절을 제안했다.
“전하, 만일 조선이 미국에 공사를 파견 한다면 미국은 크게 환영 할 것입니다.”

“재정 부담이 크시다면 견미(遣美)사절이 좋을 듯합니다.”

고종은 '푸트’공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파워 엘리트들만을 직접 뽑아 조선 보빙사로 워싱턴에 파견했다. 청나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개화파의 영수인 김옥균은 이 기회를 근대화의 호기로 삼았다. 그리고 당시 24세의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추천했다. 선진 문물을 보고 배우면 조선의 부패한 내정 개혁과 청나라의 정치적 기반으로부터 벗어나 자주 독립의 실천의지를 갖게 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조선은 선진화를 위해 여러 가지의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일본 군함을 사들이자는 의사를 타진(1890년)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아 선진화된 최신의 군함 보유는 물거품이 됐다. 마침 대동강에 침몰한 제네럴 셔먼호가 눈에 띄었다. 이 선박을 인양하여 철갑증기선을 건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수십만 냥의 자금을 투입해 10개월 만에 복원은 했으나,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바람에 철갑선 건조는 실패하고 말았다.

김옥균은 열기구를 만들기 위해 학과 두루미 10만 마리를 잡아 그 깃털을 뽑아 아교를 붙여 하늘로 띄웠으나 열기구도 추락하고 만다. 이런 과정에서 선진화된 것이 별로 없이 한일합방이 됐다.

이런 시기에 철도 건설은 활기를 띄었다. 일제가 군수수탈 정책에 따라 수많은 철도를 건설하기에 이른 이유이다. 우리 손으로 시작하지 못한 것은 관료들의 안이한 태도가 주 요인이었다.
그러나 압록강 철교 건설은 다르다. 이는 3대에 걸친 공덕(功德)으로 평가받는 일이었다.

철도건설을 남북으로 설치했다. 더하여 강을 건너 남만주까지 내달기 위해 압록강철교 설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남쪽에는 1906년 4월 3일 군용 철도 경의선이 개통됐다. 1908년 4월 1일 부터는 부산에서 신의주로 향하는 직통열차가 운행됐다. 압록강 철교는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건설 도중에 한일 합방이 된다.

아무튼 당시 압록강 철교의 국가적인 관심이 얼마나 컸던지 조선의 황제 이왕은 1910년 1월 27일 경성을 출발하여 신의주까지 찾아와 이 공사를 직접 참관했다. 오래 전 이하영이 제안하였던 철도의 중요성을 이제야 왕실이 관심을 보인 것이다.

많은 곡절을 겪은 압록강 철교는 단선철교와 양편인도교(총연장 3239척. 공사비 191만 700원)로 건설되었다. 당초 계획에 없던 개폐안까지 추가로 진행됐다. 압록강철교 건설 공사는 1908년 8월에 착공하여 1911년 11월 1일 준공됐다. 공사에 동원된 인력만 연 51만 명이었다. 건설비 175만원은 일본과 청나라가 분담했다.

압록강 하구로부터 상류 쪽 45km 지점을 가로질러 신의주와 중국의 단둥(丹東)을 연결하는 인도교 겸용 장대 압록강 철교는 총연장 944m이다. 교각은 모두 12개였다. 교각의 기초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으로서도 처음인 압기잠함(壓氣潛函) 공법으로 시공됐다.

교량 상판은 활 모양의 궁상형(弓狀形) 강형(鋼桁)을 사용했다. 한국의 철강 산업이 일천했으므로 이 트러스는 모두 미국에서 1905~1910년 사이 제작된 철강재를 도입했다. 일본 철강재를 사용하지 못한 것은 그 당시만 해도 일본 역시 철강 산업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압록강 철교는 상판 가운데에 단선 철로를 깔고, 좌우로 2.6m의 인도교가 설치됐다.

압록강철교는 한반도에 가설된 두 번째 철교이다. 이 교량은 최초의 근대적 장대 인도교라는 의미에서 주목된다. 더욱이 국내 유일의 회전식 장대교라는 브랜드를 지닌다. 이 교량에는 신의주로부터 9번째 교각을 개폐식으로 건설했다. 회전 방식은 케이슨(caisson)공법을 적용했다. 교각을 90° 회전시켜 다리를 열면 ‘十’자형이 되고, 닫으면 ‘一’자형으로 여닫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45°를 여는 데 2~3분이 걸렸다

이 방식은 조작상의 위험이 많아 수동으로 개폐했다. 이 다리는 하루 2번(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다리를 열고 닫았다. 1934년 3월 31일부터는 교량 보존 등을 이유로 가동을 중지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기념해 단 한 번 가동된 적이 있을 뿐이다.

압록강철교는 당시 ‘동양 제일의 국경 명물’로 일컬어지며 해외에서도 이름이 났다. 수평으로 회전해 다리를 개폐하는 선개교(旋開橋, swing bridge) 방식이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했기 때문이다.

압록강철교는 ‘얄루리버브리지(Yalu River Bridge)’라 부르기도 한다. 이 다리는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미군의 B-29에 의해 폭파됐다. 그 덕에 지금은 압록강단교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중앙 교각 위의 탑 높이는 28m, 항의 총 중량은 9,247톤이다.

퓰리처상을 받은 압록강 철교의 끊어진 사진 모습을 보고 시인 박두진은 ‘8월의 강’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강은 어제의 한숨을, 눈물을, 피 흘림을, 죽음 등을 기억한다.’ 비관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감상이다. 아무튼 교량은 철강 산업의 라이프 스타일을 잘 나타내 주는 철강 산업의 중요한 수요처이다.

현재의 교량은 과거와는 확실히 다르게 고강도 철강재의 사용이 변화무쌍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작금의 철강환경은 사업 규모의 확대 속도보다 시장 변화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과제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제까지 쌓아온 경험이 쓸모없어지는 일도 자주 확인된다. 선진국의 변화를 직접 관찰하고 파악했던 ‘로웰’과 이하영처럼, 수요처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고, 듣고, 배우는 준비된 경영자만이 살아남는 긴장의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철강 산업도 그렇다.

만인이 평안히 다닐 수 있게 많은 다리를 놓는 것은 불교의 3대 공덕이라고 하니 더 많은 다리에 더 많은 철강재가 쓰여지기를 기대한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