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양옆으로 드넓게 펼쳐진 논밭은 영화 인도차이나의 장면을 연상시켰다. 논밭 안에 많은 묘지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개장식’이라는 그들만의 장례 문화다. 망자는 일단 집 근처의 논이나 들판의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3년이나 5년 후 습기 때문에 시신은 뼈만 남는다. 이때 묘를 개장해 살을 발라내고 뼈만 깨끗하게 추려서 석관이나 항아리에 모신 뒤 생전에 고인이 묻히길 원했던 곳에 다시 안장된다. 배산임수의 명당을 고집하는 우리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땅을 사서 모실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기후를 이용하고 가까운 곳에 모셔서 마음이라도 편하자는 생각에서 내려온 전통은 아닐는지. 몸이 가난한 사람은 마음의 부자라는 말이 떠 올랐다. 인간에게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조상은 복 받은 것이리라.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하기 마련이다. 요즘은 여기에도 납골당이 들어서고 있고 특히 한국 사람들의 새로운 사업 아이템으로 떠오르고 있다.
카이딘 황제릉은 주권국의 왕을 포기하고 지배자의 꼭두각시로 살아간 그의 내력답게 프랑스 왕릉의 축소판이었다. 화려하게 치장된 그의 동상 18미터 아래에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베트남을 배반해서 베트남의 유적이 되었고 그래서 후세의 베트남에 일조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전혀 다른 죽음과 마주했다. 바로 틱광둑(釋廣德) 스님의 이야기다. 1963년, 베트남은 가톨릭 신자인 딘 디엠(吳廷琰) 대통령의 불교 탄압과 폭정으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틱쾅둑 스님은 1963년 6월 11일 오전 사이공 시내에 위치한 미국대사관 부근의 교차로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제자 승려가 스승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주위를 돌며 가솔린을 흠뻑 부었다. 틱쾅둑 스님이 성냥을 그어 자신의 가사에 불을 붙이는 순간, 화염이 치솟았다. 틱쾅둑 스님은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불길에 온몸을 맡겼다. 틱쾅둑 스님은 그 전날 제자들에게 “만약 내가 소신공양 중 앞으로 넘어지면 나라가 흉하게 될 것이니 그때는 해외로 망명하라. 내가 뒤로 쓰러지면 우리들의 투쟁은 승리하고 평화를 맞게 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불길이 거세지자 틱쾅둑 스님의 상반신이 잠시 앞으로 기울었다. 곧 그는 다시 허리를 곧추세워 가부좌를 했고, 마지막 순간 뒤로 조용히 넘어졌다. 분신하는 동안 그는 한줌의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주위에 있던 스님들이 화염에 휩싸인 스님을 향해 절을 올렸고,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주변에 출동했던 베트남군의 일부 병사들마저 ‘받들어 총’ 자세로 예를 표했다. 그의 분신은 남베트남의 쿠데타로 이어지고 딘 디엠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지금 티엔무사원 전시관에는 틱광둑 스님이 분신할 때 타고 온 파란색의 오스틴자동차와 함께 타다 남은 그의 심장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어린 스님의 사진이 걸려 있다. 심장은 소신공양 후 8시간의 화장 속에서도 태워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믿는 자가 믿는 것을 위해 믿지 못하는 자에게 헌신(獻身) 되는 궁극의 죽음이었다. 사원 너머 수평선 위로 어둠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갈등과 반목의 우리 땅에 그 같은 사람이 있는지 생각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기억 속에 환생한다.
김시래(정보경영학박사, 트렌드라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