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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대왕참나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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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대왕참나무 이야기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나태주 시인은 풀꽃을 두고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비단 꽃뿐이랴. 아침에 창을 열 때마다 멀리 보이는 초록숲 위로 우뚝 솟은 도봉산의 바위 봉우리도, 초등학교 담장 너머 바람을 타는 초록의 나무들도 보면 볼수록 예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새봄을 맞아 저마다 색색의 꽃을 피워 달던 나무들이 꽃을 버리고 일제히 초록 일색으로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요즘은 어느 나무를 보아도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정겹기만 하다. 나무들이 펼쳐 보이는 초록은 팍팍하기만 한 일상에 지쳐 날 선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보듬어 준다. 가지마다 수천수만의 잎을 가득 달고 짙은 녹음을 드리운 나무들을 볼 때면 초록의 나무야말로 가장 믿음직스럽고 힘이 센 존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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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너머로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 가로 유난히 반짝이는 잎을 단 키 큰 활엽수 몇 그루가 줄지어 서 있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다른 나무들의 잎은 이미 짙은 녹색으로 어두워졌는데도 유독 연둣빛의 야들야들한 이파리를 가득 달고 서 있는 그 나무들은 다름 아닌 대왕참나무이다. 잎의 색깔도, 모양도 유별난 이 나무를 알게 된 건 불과 몇 년 안 되었다. 하지만 이 나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이미 80년이 넘었고, 그 사연 또한 각별하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 시상대에 오른 조선의 건각 손기정 선수가 월계관을 쓰고 부상으로 받았던 묘목이 다름 아닌 대왕참나무였다. 손기정 선수는 이 묘목 화분으로 가슴에 주홍글씨 같았던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다. 함께 시상대에 올랐던 동메달의 남승룡 선수가 부러워했던 것도 목에 건 금메달이 아닌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던 이 묘목 화분이었다고 한다. 손기정은 이 화분의 나무를 자신의 모교인 서울역 뒤 만리재 언덕에 있는 양정고 교정에 심었다. 그렇게 심은 어린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지금도 손기정 기념관 앞에서 '서울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어 '월계관수'로 불리며 거목으로 푸른 기상을 떨치며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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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대왕참나무는 1980년대 이후 조림수와 조경수, 가로수 용도로 수입되어 거리에서나 공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나무가 되었다. 대왕참나무는 미국 원산으로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키가 25~30m까지 자라는 참나무과 중에서 가장 큰 낙엽교목이다. 줄기와 큰 가지에 핀처럼 작은 가지가 나와 있어 미국에서는 핀 오크(pin oak)라고 부른다.
줄기는 아주 곧게 자라고 잎은 가장자리가 3~7개로 깊게 파여 있으며 이 중 7개로 파인 것이 한자 왕(王)와 흡사하다. 잎 뒷면에는 흰색 털이 있고 꽃은 암수한그루로 4~5월에 아래로 늘어진 꽃줄기에 황록색으로 피는데 꽃잎이 없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열매는 우리나라 도토리보다 작고 납작하며 복자기나 중국단풍보다 늦게 단풍이 들고 겨울까지도 잎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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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참나무와 비슷한 참나무로 유럽 원산의 루브라 참나무가 있는데 레드오크(red oak)로 불린다. 대왕참나무는 결각이 깊고 날카로운데 비해서 루브라 참나무는 잎 가장자리가 우리나라 신갈나무처럼 둥글둥글한 모양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 운동장이 개방되는 일요일, 멀리서 바라만 보던 대왕참나무를 보려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햇빛이 쨍한 한낮임에도 나무 그늘은 서늘하다. 나무의 수피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나무 하나를 알아가는 일이 결코 사람을 알아가는 일에 못지않다는 것을. 나이테를 제 몸속에 숨기고 해마다 새잎을 내고 열매를 맺고, 가을이면 곱게 물들 줄 아는 나무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