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시조는 온조와 비류 그리고 구태 3명이다. 온조와 비류는 형제로서 계통이 같지만, 온조의 ‘고구려계통설’과 비류의 ‘부여계통설’로 갈리고, 구태(仇台)는 두 사람과 다른 계통이다.
대륙 백제는 제(齊)나라(AD 1046년~ BC 221년) 후계 세력이다. 중심 세력인 이래족(夷來族:래이족)과 우이(嵎夷)족은 이전부터 서쪽에서 이주하여, 요동반도 주변에서 살았던 민족이다.
필자는 중국 정사(正史)인 북사(北史)·수서(隋書)의 부여왕(夫餘王) 동명(東明) 후손 구태(仇台)가 요서에서 서자몽(西紫蒙-베이징 북쪽)으로 옮겨 ‘서부여’를 창업(122년)한 것에 주목한다.
구태 후손집단은 선비족에게 밀려 서자몽에서 요서로 이동, 대방(하북 노룡현)과 녹산(백랑산-하북 건평현)으로 분화한다. 대방은 바다를 건너와서 한반도 서남부지역과 일본을 장악한다.
백제의 대성 팔족은 대륙의 국씨(國氏), 연(燕)씨, 협(劦)씨, 리(刕)·려(黎)씨, 익산-논산 사(沙)씨, 나주 목(木)씨는 임(林)씨로 개성하고 야마토 왜 소아(蘇我)씨로 아스카 문명을 일으킨다.
특히, 대방 세력 중 일부는 신라 김알지 후손처럼, 백제 왕실을 접수한다. 백제 부여씨 왕조로 개창한 비유왕(20대)부터 온조 계열의 해씨 왕조를 마감시키고, 구태 계열의 왕조가 들어선다.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 북방 민족이 패권 다툼의 혼란과 분열하는 사이, 각자 국력을 키웠다. 특히, 백제는 중국과 인도,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잇는 해상왕국으로 동아시아에서 군림했다.
백제 전성기 근초고왕은 태자(근수구왕)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이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살해했으니, 중국의 넓은 변방 땅을 백제가 차지했기 충분했다.
고고학계는 영산강 유역에서 큰 옹기 한 쌍을 관으로 시신을 매장하는 방식의 고분군을 발굴했지만, 백제 영향력을 벗어난 여러 양식의 무덤들로 인해, 아직 그 실체가 미궁에 빠져 있다.
백제와 일본의 교류는 개국 초기로, 근초고왕 아들이 칠지도를 선물한 시기를 넘어, 백강 전투(663년)에서 백·왜 연합군이 라·당 연합에 패배하면서, 왜는 독자 연호와 역사를 시작했다.
일제 일본 관학자들은 식민지 사관에 의거, 평양의 낙랑과 경남 일대의 가야 고분을 조사해서 북부는 중국문화, 남부는 일본문화 흔적을 찾아, 조선이 양국의 식민지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일제는 1921년 경주 신라 금관을 ‘금관총’이라고 했고 광주·진주 등지 유물을 발굴했다. 작금에도 나주 회진 아파트형 고분은 목(木)씨 무덤으로 밝혔지만, 묘제 조사와 연구는 등한했다.
이후, 무령왕릉 유물이 5천여 점 발굴하고, 나주 곳곳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했어도, 고대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와 관련된 역사적인 실체들을 명확하게 파악함에 어떤 도움을 못 주고 있다.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이 강단 사학과 한국 고대사 연구에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서, 대륙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과 영산강 주변 옹관분구무덤·굴식돌방무덤의 비밀을 밝히는 것은 어렵다.
역사는 분실된 거대한 조각의 그림을 맞추는 작업으로 ‘과거 사실을 규명’하여 지속으로 대화하는 것이다. 역사가의 주요 임무는 논리 개발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배제하지 않아야 한다.
고고학계는 대형 옹관 고분에서 발견된 '장고분' 유적에 대해, 발굴 기술 문제점과 기존의 학설을 넘어서, 역사적 사실과 끊임없는 질문을 통하여, 비류 백제와의 연계성도 규명해야 한다.
임실근 (사)한국스마트유통물류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