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만 상품전략연구소장

미국 비자는 단순한 입국 허가증이 아니다. 정치적 신념, SNS 활동, 직업적 배경까지 심사 대상이 되면서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있다. 반면, 유럽행 비자는 상대적으로 덜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 고대 로마에서 시민권이 목숨을 건 투쟁의 결과였듯, 현대의 미국 비자도 치열한 경쟁과 검증을 요구한다. 미국행 비자는 희소성을 넘어 정치적·외교적 의미까지 내포한 자격증이 되어 가고 있다.
시민권을 정치화한 황제, 트럼프의 비자 정책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 비자 정책을 단순한 출입국 심사를 넘어 정치적·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했다. SNS 활동, 직업, 사상까지 검토해 비자를 거부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비자는 사실상 ‘정치적 자격증’이 되어 가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런 정치적 비자 활용은 고대 로마 시대에도 존재했다.
212년, 로마 황제 카라칼라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 전역의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는 인류사에서 유례없는 포괄적 시민권 확대 조치였다. 하지만 그 배경은 고상하지 않았다. 시민에게만 부과되던 세금을 확대하고, 중앙집권적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카라칼라는 시민권을 통치와 수탈의 수단으로 바꾼 셈이다.
오늘날 미국 비자 정책도 그와 닮았다. 정치적 검증이 강화되고, 충성도에 따라 입국 자격이 결정되는 사회. 고대 로마의 시민권이 황제 권력의 도구였듯, 트럼프의 미국 비자는 글로벌 권력의 스크린이다.
검투사가 목숨과 바꾼 시민권과 미국 비자
고대 로마에서 시민권은 오늘날 미국 시민권이나 비자보다도 더 값진 것이었다. 시민권을 얻으면 법적 보호는 물론 세금 감면, 재산 소유, 정치 참여 등의 권리가 주어졌다. 그러나 시민이 되기까지의 길은 험난했다.
대표적인 예가 검투사와 전쟁 영웅이었다. 영화 쿼바디스나 글래디에이터에서 보듯, 검투사들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실제로 검투사 중 일부는 수십 번의 경기에서 살아남아야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대부분은 경기장에서 죽거나 부상을 입고 버려졌다.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이들도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속주 출신 군인이 25년 이상 복무하면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는데, 이는 오늘날 미국의 군 복무 후 시민권 취득 제도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미국은 특정 외국인에게 군 복무를 조건으로 시민권을 부여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외국인 군인의 시민권 취득이 까다로워지면서 일부는 시민권을 받기도 전에 강제 추방당하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미국 비자 정책 강화, 어디까지 왔나
트럼프 행정부는 안보를 이유로 외국인 입국 심사를 대폭 강화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조차 예외가 아니다. 1987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오스카 아리아스 전 코스타리카 대통령은 미국 정부로부터 비자가 취소되었다. 그는 SNS를 통해 미국 정부를 비판한 것이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한 미국 국무부는 비자 신청자의 SNS를 검열하는 정책을 시행 중이다. 학생 비자(F, M, J)를 포함한 여러 비자 유형에서 신청자의 과거 SNS 활동을 조사하고, 미국에 적대적인 태도가 발견될 경우 비자를 거부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미국이 단순한 신원 조회를 넘어 외국인의 사상과 의견까지 검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일부 비자 정책을 완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보안과 관련된 심사는 여전히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다. H-1B 비자 승인율은 소폭 회복되었지만, 특정 국가 출신이나 SNS 활동이 문제 되는 경우 여전히 거부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합법 이민자도 안심할 수 없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H-1B(전문직 취업 비자) 소지자들에게 미국을 떠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한 번 출국했다가 재입국이 거부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구글, 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들은 직원들에게 해외여행을 자제하라는 법률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H-1B 비자 거부율이 15%까지 치솟았던 것에 비하면, 트럼프의 의지는 강경해 보인다.
미국에서 합법적인 비자를 소지하고 있더라도 추방 위험이 상존한다. 최근 브라운대 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레바논 출신 신장이식 전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레바논 방문 중 헤즈볼라 지도자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 기록이 문제 삼아져 강제 추방당했다. 이는 미국이 합법 이민자조차도 정치적 또는 외교적 이유로 추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유럽도 점점 테러 방지 목적으로 비자 심사를 강화하고 있어, 미국과 비교해 완전히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미국처럼 SNS 활동까지 검열하는 정책은 아직 유럽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비자, 단순한 입국 허가가 아니다
미국 비자는 단순한 여행 허가증이 아니다. 정치적 입장, 온라인 활동, 직업 등 다양한 요소가 비자의 운명을 좌우한다. 미국 국무부는 비자 신청자의 SNS를 검열해 미국에 적대적인 태도가 보이면 비자를 거부할 수 있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미국 비자 심사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외국인 전문가들이 캐나다, 호주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 가디언도 미국 비자 거부 사례가 증가하면서 유럽이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이러한 비자 정책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미국 비자는 이제 정치적 충성도까지 요구하는 자격증으로 변하고 있다. 반면, 유럽행 비자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다. 미국행 비자는 여전히 귀하지만 점점 더 많은 이들에게 까다로운 시험이 되어 가고 있다.
미국의 꿈은 사라지고 미국 시민권에 투자하는 세상
미국 비자는 이제 단순한 입국 허가가 아니다. 정치적 신념, SNS 활동, 직업적 신분까지 심사 대상이 되면서 외교적·정치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 로마 시대 검투사와 전쟁 영웅이 시민권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처럼, 현대의 미국 비자 신청자들도 치열한 경쟁과 검증을 거쳐야 한다. 반면, 유럽행 비자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 대조를 이룬다. 결국 미국 비자는 점점 더 정치적·외교적 요소가 반영된 허가증으로 변하고 있으며, 단순한 입국 허가가 아닌 일종의 신념 검증 절차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임광복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ac@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