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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안보 톺아보기] 자원 확보를 넘어서: 에너지 안보의 패러다임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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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안보 톺아보기] 자원 확보를 넘어서: 에너지 안보의 패러다임 전환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
이한우 국제정치학 박사(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이미지 확대보기
이한우 국제정치학 박사(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
‘에너지 안보’라는 말은 오랫동안 자원의 안정적 확보와 수입처 다변화라는 틀 속에 갇혀 있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는 에너지가 단지 경제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와 외교 전략의 핵심 사안이 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후 한국을 포함한 주요 수입국들은 비축, 효율 향상, 공급처 다변화 등을 중심으로 ‘공급 안정’ 전략을 에너지 안보의 정답처럼 여겨왔다. 이러한 접근은 석유와 가스라는 물리적 자원을 중심으로 작동하던 20세기형 에너지 체계에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일정 기간 동안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 체계를 유지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해왔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그 전제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기후 위기 대응,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기술 패권 경쟁, 사회적 수용성과 국제 규범의 충돌까지 에너지 안보를 둘러싼 위협은 훨씬 복합적이고 정교해졌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 공급을 둘러싼 지정학적 리스크를 다시 전면으로 부상시켰고, 미·중 간 기술 전쟁은 자원과 기술, 표준을 동시에 둘러싼 다중 전선의 전쟁이 되어가고 있다. 에너지 문제는 더 이상 자원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과 외교, 산업과 규범이 맞물리는 종합 전략의 문제로 재구성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에너지 안보란 과연 무엇인가?” 단지 자원을 많이 확보한다고 해서 에너지 안보가 보장되는가? 기술은 누가 주도할 것인가? 국제 통상과 기후 규범의 변화는 우리의 산업과 안보를 어떻게 흔들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지 학문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산업 현장과 외교 현장, 지역 정책 현장에서 지금 이 순간 실질적인 압박으로 다가오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3년 ‘세계 에너지 전망(World Energy Outlook)’에서 에너지 안보를 “단순한 공급 안정성이 아니라 회복탄력성과 기술 자립, 규범 대응력, 사회적 수용성을 포괄하는 전략적 능력”으로 재정의했다. 물량 중심의 사고를 넘어 기술과 제도, 사회와 외교가 통합돼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IEA는 또한 “기술 집중도가 높고 규범화가 진행될수록 에너지는 산업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가 된다”고 경고했다. 이는 에너지 안보를 단지 에너지 정책으로 다룰 수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도 같은 해 보고서를 통해 “청정에너지 전환은 자원의 독점에서 기술과 기준의 독점으로 권력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20세기 에너지 안보가 석유·가스의 확보를 의미했다면, 21세기 에너지 안보는 수소·전력망·희토류·반도체·디지털 제어권의 확보로 재구성되고 있다. 에너지 시장의 지형이 물리적 거리보다 기술과 규범의 밀도에 따라 좌우되는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자원을 ‘보유’한 자보다 기술과 기준을 ‘설계’한 자가 유리한 시대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에너지 수입 의존국이다. 원유는 중동, LNG는 러시아와 카타르, 석탄은 호주에 집중돼 있고, 철강·석유화학·반도체·조선 등 주력 산업은 에너지 다소비형 구조다. 에너지 공급망이 흔들리게 되면 수출 기반 제조업 전반에 치명적인 타격이 불가피하다. 동시에 수소·ESS·스마트그리드·SMR 등 전략 기술 분야에서는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구조적 취약성과 전략적 기회의 양면이 공존하는 한국은 더 이상 단편적인 공급 안정 논리로는 위기를 넘길 수 없다. 지금의 위기는 새로운 전략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질문을 바꾸는 일이다. “무엇을 얼마나 확보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기술·외교·규범·사회 기반과 통합해 확보하고 유지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에너지 안보는 특정 자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 체계와 정책 정합성의 문제이며, 산업과 외교, 기후와 안보가 교차하는 정책의 핵심축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다시 에너지 안보를 논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