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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안보 톺아보기] 전략적 공급 조절 시대, 수요국의 생존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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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안보 톺아보기] 전략적 공급 조절 시대, 수요국의 생존 전략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이미지 확대보기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OPEC+는 2024년 6월,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를 포함한 8개 주요 산유국이 하루 220만 배럴 규모의 자발적 감산을 발표했으며, 이 조치는 2025년 1분기까지 연장되었다. 공식적인 명분은 시장 안정과 투자 유도였지만, 실제로는 유가의 하방 지지선을 공고히 하고 공급자 연합으로서 국제 시장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산유국들의 감산과 증산이 반복되는 지금의 상황은 단순한 수급 조절 문제가 아니다. 그 핵심에는 누가 유가를 통제할 것인가, 시장의 위험을 누가 감수할 것인가, 그리고 가격을 넘어선 새로운 질서를 누가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려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짜기 위한 일종의 '설계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한국은 별다른 전략이 없는 듯하다. 2023년 기준, 전체 원유 수입의 약 66%가 중동 5개국에, LNG의 45%가 중동과 러시아에 집중돼 있었다. 유가가 배럴당 10달러만 상승해도 연간 지출은 10조 원 이상 증가한다. 이는 한국 GDP의 약 0.5%에 해당하며, 무역수지 악화와 산업용 에너지 비용 상승으로 직결된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은 단기 변동이 아닌 장기적 전략 부재의 결과다.

수입처와 가격 결정권을 모두 외부에 맡긴 구조 속에서 한국은 다양한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다. 2024년 3분기 기준, 국내 4대 석유화학 기업의 영업적자는 4,000억 원을 넘어섰고, 수출은 전년 대비 14% 이상 감소했다. 이는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라, 국제 유가를 둘러싼 권력관계 변화가 산업 운영에 실시간으로 침투하고 있다는 명확한 신호다.
그동안 IEA 집단 비축 체계나 산유국과의 양자 계약에 의존해온 한국은, 위기 시 실효성 부족과 협상력 부재라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이제는 가격을 통제하지 못하는 구조 자체를 바꾸는 전략적 전환이 필요하다. 수요국인 한국의 생존 조건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수요국 연대와 공동 구매의 제도화다. EU는 러시아산 가스를 대체하기 위해 AggregateEU를 구축했고, 아시아에서도 일본·인도·한국 등이 공동입찰 논의를 시작했다. 한국은 일본, 대만, 싱가포르와 함께 2년 내 '동아시아 수요국 협력 프레임워크'를 구축해, 한국가스공사 등 실무기관이 수요 예측과 계약 조건을 공동 조율하는 구조를 마련하고, 5년 내 중동 의존도를 50% 이하로 줄여야 한다. 이러한 협력 구조는 에너지 안보뿐 아니라 외교·산업 연계성 강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둘째, 전략비축유의 국제 연동성과 민관 공동 운영 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비축유의 46%를 민간이 보유한 한국은 방출 속도와 범위에서 제한적이다. 산업부–석유공사가 주도하는 민관 공동 비축 계약 확대와 IEA와의 사전 방출 시나리오 정례화는 1년 내 착수 가능한 현실적 조정 과제다.

셋째, 에너지다소비형 산업을 첨단기술 기반 산업으로 전환하여 유가 변동에 대한 탄력성이 강한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 석유화학 산업은 나프타 의존도가 높아 국제 유가 변동에 매우 취약한 구조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수소·암모니아 기반 연료 전환, 고효율 열공급 체계 도입, 재활용 원료 확대 등이 핵심 기술 과제로 떠오른다. 현재 울산과 여수 등지에서 일부 실증이 진행 중이지만, 이를 개별 기술 시범에 그치지 않고 산업단지 단위의 전환사업 패키지로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이러한 구조 전환을 5년 내 20개소 이상으로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탄소중립 전환펀드, 규제 특례, 세제 인센티브 등 재정·제도적 수단과 기술 실증을 유기적으로 연계한 정책 묶음을 설계해야 한다.

한국은 에너지 안보를 외교와 산업 전략의 교차점에서 재설계해야 할 때이다. 공동 구매 연대, 전략비축 연동, 기술 주권 확보라는 세 가지 전략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것도 10년 뒤를 내다본 계획이 아니라, 지금 착수해야 할 구조 전환의 실천 목록이다.

중견국이 국제질서를 설계할 수는 없지만, 설계된 질서에 끌려가지 않는 전략은 분명 존재한다. 연대 전략, 기술 투자, 위기 대응 시나리오를 미리 설계하는 국가만이 감산 시대에도 에너지 자립성과 산업 회복력을 유지할 수 있다. 그 첫걸음은 더 이상 유가에 반응하는 수요국이 아니라, 질서의 구조를 읽고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전략 국가로 나아가는 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