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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안보 톺아보기] '분산에너지'로 만드는 철벽 에너지 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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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안보 톺아보기] '분산에너지'로 만드는 철벽 에너지 안보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이미지 확대보기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첫날 밤 키이우의 불빛이 하나씩 꺼져가는 모습은 현대전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발전소와 송전망에 대한 정밀 타격으로 도시 전체가 암흑에 잠기자 소통은 곧바로 마비되었다. 현대전에서 선제적 타격 대상은 군사기지가 아니라 전력망, 통신망, 데이터센터가 된다.

한국은 더욱 위험한 지형 위에 서 있다. 전체 에너지의 94%를 수입에 의존하며, 수송 경로는 호르무즈 해협과 말라카 해협, 동중국해를 거쳐 대한해협으로 이어지는 좁고 복잡한 해상 수송망에 집중되어 있다. 발전소는 동해안 원전벨트와 서해안 화력벨트에 집중되어 있고, 이를 연결하는 초고압 송전선은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단일 실패점(SPoF)' 구조다. 서해안 주요 변전소나 관제센터 등 몇 개의 핵심 지점만 공격당해도 수도권 전체가 마비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의 장사정포 위협, GPS 교란, 사이버 공격은 이미 현실화된 위협이며, EMP(전자기 펄스) 공격, 드론을 이용한 송전설비 타격, 감시 회피형 정밀 공격 기술은 한국의 거대 전력 인프라를 언제든 무력화시킬 수 있다. 더욱이 수도권에 국방부, 대통령실, 국가재난통제센터 등이 집중되어 있어, 전력망이 무력화되면 곧바로 국가 소통과 통제 기능이 마비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비군사시설이 군사적 표적이 되는 '회색지대 전술'의 시대에 분산에너지는 단순한 전력 대안이 아니라 국가 방어선이다. 이스라엘은 민간 송전망에도 사이버방어와 물리적 방호 설계를 의무화하고 있고, 미국은 NSA와 에너지부가 공동으로 'Grid Defense Collaboration'을 운용하며 에너지 인프라를 군사 자산으로 분류한다.
분산에너지 시스템은 전력 생산 및 공급 지점이 분산되므로 공격자는 선택에 어려움을 겪고, 방어자는 다중 대안을 확보하여 특정 지역의 피해가 전체 시스템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분산에너지가 제공하는 전략적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율적인 회복력이다. 일부 지역이 마비되어도 나머지 시스템이 이를 자동으로 보완하고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전력망 전체의 안정성을 확보한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스스로 치유하고 기능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둘째, 지역 단위 에너지 자립이다. 각 지역이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여, 외부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재난 발생 시에도 독립적인 에너지 공급이 가능하다. 이는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지속 가능한 모델이다.

셋째, 시민 참여와 효율적인 관리이다. 시민이 직접 에너지 생산과 운영에 참여함으로써 에너지 절약 및 효율적인 사용을 유도하고, 일상 속에서 에너지 시스템에 대한 감시와 유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는 에너지 시스템을 더욱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에너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미 해외에서는 분산에너지 기반 전략이 군사·안보 전략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미국 국방부는 43개 미군 기지에 독립형 마이크로그리드를 구축하고 있으며, 하와이의 스코필드 병참기지는 100% 신재생 기반의 전력 자립 시스템을 갖췄다. 미국은 GridEx 훈련을 통해 사이버와 물리적 복합공격에 대한 대응 체계를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있다. 일본 센다이시는 대지진 이후 병원·학교에 자가 전력망을 구축해 재난 상황에서도 통제 기능을 유지하며, 덴마크 삼쇠섬은 마을 단위 자립 전력망을 통해 에너지 안보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한국도 전시·재난 시 필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전력 자립섹터 구축이 필요하다. 병원·학교·지자체 청사 등 주요 공공시설에 72시간 이상 자립 가능한 마이크로그리드를 설치하고, 태양광·연료전지·ESS를 혼합한 시스템에 AI 기반 해킹 대응 기술을 탑재해야 한다. 더 나아가 국방부와 산업부가 공동으로 '에너지-국방 연계 협의체'를 구성하고, '국가에너지방호 훈련체계'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에 한국전력공사(KEPCO)는 중앙집중형에서 분산형 조정자로, 한국전력거래소(KPX)는 실시간 분산전력 거래플랫폼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금까지 에너지 안보를 주로 공급 안정성이나 경제적 측면에서만 논의해왔다면, 이제는 군사 안보의 핵심 자산으로 전환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