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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동북아 지중해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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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동북아 지중해 구상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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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는 오랫동안 ‘동해’와 ‘일본해’라는 명칭으로 논쟁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바다를 과거 갈등의 상징이 아니라 미래 협력의 공간으로 재인식할 때가 왔다.
‘동북아지중해(Northeast Asian Mediterranean, New-Med)’ 구상은 특정 바다의 명칭 변경이 아니라 이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관한 이야기다. 한마디로 ‘동해’라는 이름은 존중하되, 지중해처럼 공동 번영의 바다로 만들자는 것이다.

국제수로기구(IHO)는 이미 디지털 해도체계(S-130)로 전환해 해역을 코드 기반으로 관리하고 있다. 명칭보다 기능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유엔해양법협약(UNCLOS) 제122조와 제123조는 ‘반폐쇄해’를 연안국 협력 대상으로 규정한다.
한국·일본·러시아·중국이 마주한 이 해역은 바로 그 전형이다. ‘동북아지중해’ 구상은 새로운 상상력이 아니라 국제법이 이미 예고한 협력의 틀이며, 이를 현실화하는 전략적 접근이다.

첫째, 산업·에너지 협력의 제도화가 핵심이다. 수소·암모니아·해상풍력·해저케이블 등 에너지 전환 인프라는 국경을 넘어야 완성된다.
이 해역을 따라 ‘청정에너지 회랑’을 구축하면 수소·전력·탄소저감 기술을 공동 실증하고 거래할 수 있다. 울산과 후쿠오카를 잇는 ‘한·일 청정에너지 회랑 실증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기술·데이터 교류를 위한 ‘한·일 해양표준 공동연구센터’를 설립한다면 협력의 실체가 한층 뚜렷해질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회랑은 부산~고베, 포항~시모노세키 등으로 확장되며, 동북아 해역 전반을 잇는 청정에너지 네트워크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둘째, 기술과 안전 표준의 공동화다. 국제해사기구(IMO)와 국제표준화기구(ISO)가 추진 중인 암모니아·수소연료 선박 안전기준 제정 과정에 한·일이 함께 참여하면, 동북아 표준을 국제표준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

기술 규범을 선점하는 국가는 시장을 선도한다. 한·일 공동 참여는 향후 수소선박·암모니아 연료 시장의 ‘룰 메이커’로 자리할 기회를 열 것이다. 나아가 관련 인증·검증 체계를 공동 개발하면, 국제해운에서 요구되는 그린선박 검증 기준을 우리가 주도할 수도 있다. 이는 단순한 산업협력을 넘어 기술외교의 새로운 장을 여는 일이다.

셋째, 제도적 협력기구의 창설이다. ‘동북아지중해 협의체’를 구성해 환경, 기후, 해양 안전, 에너지 전환을 논의하는 다자 거버넌스를 마련해야 한다.
이 기구는 정책 협의뿐 아니라 데이터 공유, 공동 실증, 시장 정보 교환을 담당하는 실질적 플랫폼이 될 수 있다. 바르셀로나 프로세스(Barcelona Process)가 유럽 지중해 협력을 제도화했듯, 동북아지중해 협의체는 에너지와 기술, 기후를 매개로 한 새로운 지역협력 모델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울산은 기존의 수소산업 생태계를 바탕으로 동북아 협력의 실증 거점으로 기능하며, 한국의 중추적 역할을 제도화할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역할도 중요하다. 중국은 경제적 참여 여지를 탐색할 것이고, 러시아는 북극 항로와 연계된 새로운 교역 루트로 주목할 것이다. 이들은 협력과 경쟁이 교차하는 균형 파트너로서 동북아지중해 질서를 입체적으로 형성할 것이다. 미국은 이를 한·일 협력의 제도화 수단으로, 유럽연합(EU)은 ‘두 번째 지중해 모델’로 평가할 가능성이 높다.

이 구상이 실현되면 동북아 해역은 경쟁 구조에서 상호 의존 구조로 전환된다. 석유와 가스의 회랑 대신 수소와 전력의 회랑이 흐르고, 영토 분쟁의 바다 대신 공동 실험의 바다가 펼쳐진다. 울산·부산·후쿠오카·고베는 기술과 산업이 맞닿는 거점으로 기능하며, 이 해역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청정에너지 협력 지대로 변모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구상이 지도를 바꾸려는 시도가 아니라 인식을 바꾸는 전략이라는 점이다. 지도상의 이름이 달라지지 않아도, 이 바다를 ‘동북아지중해’로 인식하고 공동 프로젝트를 실행하면 협력 질서는 자연히 형성된다. 이제 이 바다는 분리의 경계가 아니라 기술·에너지·산업·기후대응을 공유하는 공동의 무대다.

‘동북아지중해’는 새로운 이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이다. ‘동해’를 존중하면서 협력의 장으로 인식할 때 한·일 양국은 과거의 논쟁을 넘어 미래 질서를 설계할 수 있다. 지도를 바꾸지 않고도 질서를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품격 있는 외교이며, 동북아 평화와 번영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