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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지금 숲은 가을 채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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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지금 숲은 가을 채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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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숲은 가을 채비 중 / 백승훈 시인
입추가 지나면서 겨우 ‘극한폭염’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남녘에서 ‘극한호우’로 유례없는 물난리를 겪고 있다는 뉴스다. 극한(極限)이란 궁극의 한계, 사물이 진행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단계나 지점을 가리키는 말이니 날씨에 관한 한 이보다 센 표현은 없다. 뉴스에서 이런 표현을 접할 때마다 지구의 미래가 걱정되면서 지구 환경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오랜만에 북한산을 올랐다. 그동안 팔팔 끓는 폭염의 시간을 견디느라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산행이었다. 한동안 소원했음에도 산은 늘 그랬듯 말없이 나를 품어준다. 신발 끈을 조여 매고 천천히 오르는 산길, 숲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호젓한 산길을 따라 풀향기·꽃향기에 취해 걷는데 무언가 내 발 앞으로 휙 날아와 떨어지더니 푸드덕거렸다. 흠칫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자세히 보니 유지매미가 배를 뒤집고 버둥거린다. 잡아서 날려주려 했더니 날개를 푸득거리며 맴을 돌더니 이내 숲으로 날아갔다. 한여름에 나타나 초가을까지 울어대는 유지매미란 이름은 울음소리가 기름이 끓는 소리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매미는 5~7년을 유충으로 땅속에서 지내다가 지상으로 올라와 탈피한 후 매미로 짧은 여름을 살고 생을 마감한다. 수 주에 불과한 매미로 살기 위해 유충으로 그 오랜 시간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견딘 것인가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허무하기도 하다. 매미 소리가 잦아들면 곧 가을이다.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매미를 원망했던 게 공연히 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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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숲은 가을 채비 중 / 백승훈 시인

극한의 폭염과 폭우도 끝이 있게 마련이고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인가. 어느새 늦은 봄 보랏빛 향기로 숲을 수놓았던 등꽃이 진 자리엔 콩꼬투리 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고, 밤송이도 제법 커졌고, 참빗살나무도 가지 가득 붉은 열매를 내어 달았다. 그런가 하면 아직 익지 않은 푸른 열매들을 달고 있는 나무들도 보인다. 폭염과 폭우 속에서도 제 할 일을 잊지 않은 숲의 초록 목숨들이 내어 단 열매들은 꽃 못지않게 어여쁘고 사랑스럽다. 문득 펄펄 끓는 날씨를 핑계로 할 일도 제쳐두고 에어컨 앞만 서성였던 나 자신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숲에 오면 닫힌 마음도 열리고 날 선 생각도 순해진다. 하루재에 올라 잠시 다리쉼을 하려는데 먼저 와 있던 한 아주머니가 커피와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건네주는 음식보다 그 따뜻한 마음이 더 고마웠다. 조용히 가을 채비를 하는 숲을 찬찬히 살피며 백운대를 올랐다. 백운대를 오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오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산을 오르는 등산이 아닌,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망산(望山)의 시간이 멀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산을 오를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백운대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가슴이 탁 트인다. 백운대 9부 능선쯤에 무궁화 한 그루가 꽃을 피웠다. 백두산 여행 중 가이드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그는 천지에 오를 때 태극기나 무궁화 문양이 새겨진 옷은 절대 입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래서였을까. 백운대에서 보는 무궁화는 왠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정상 근처에서 진노랑의 각시원추리도 볼 수 있었다. 동남아에서 온 듯한 젊은이들이 경사진 바위를 엉금엉금 기어 꽃을 찍는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무더위 속에서도 어여쁜 꽃들은 피어나고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나무들은 열매를 내어 달고 가을을 채비한다. 가을이 오면 숲은 또 얼마나 화려해질까. 한낮의 태양은 여전히 여름이라고 외치듯 뜨거운 햇살을 쏘아대겠지만 숲은 우리를 가을로 초대하기 위해 조용히 가을 채비를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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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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