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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ARM 끊었다… SSD부터 시작된 ‘설계 주권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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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ARM 끊었다… SSD부터 시작된 ‘설계 주권 전쟁

300억 달러 로열티 부담 덜고 '설계 독립' 가속… 맞춤형 칩으로 초격차 강화
SSD 컨트롤러 넘어 '엑시노스' 보조 코어까지… RISC-V 중심 독자 생태계 구축
"ARM 독주 막아라" 글로벌 반도체 IP 지형도 재편… 삼성, '종합 설계 기업' 도약
성전자가 차세대 기업용 SSD 라인업인 ‘BM9K1’의 두뇌 역할을 하는 컨트롤러 칩에 오픈소스 아키텍처인 ‘RISC-V(리스크-파이브)’를 적용한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성전자가 차세대 기업용 SSD 라인업인 ‘BM9K1’의 두뇌 역할을 하는 컨트롤러 칩에 오픈소스 아키텍처인 ‘RISC-V(리스크-파이브)’를 적용한다. 이미지=제미나이3
왜 삼성전자는 수십 년간 손발을 맞춰온 세계 최대 설계 자산(IP) 기업 ARM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을까. 단순히 비용 절감 때문일까, 아니면 더 큰 설계 독립의 꿈이 있는 것일까.

기술 전문 매체 Wccftech는 지난 4(현지시간) 보도를 통해 삼성전자가 차세대 기업용 SSD 라인업인 ‘BM9K1’의 두뇌 역할을 하는 컨트롤러 칩에 오픈소스 아키텍처인 ‘RISC-V(리스크-파이브)’를 적용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시제품 단계를 넘어 실제 양산 제품에 RISC-V를 전면 도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세계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가 특정 기업에 대한 기술 종속도를 낮추고 원가 경쟁력을 극대화하겠다는 강력한 설계 독립선언으로 풀이된다.

출하량 따라 불어나는 ARM 로열티… 버리고 맞춤형 설계로 성능 퀀텀점프


삼성전자가 RISC-V로 눈을 돌린 일차적 배경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라이선스 비용이 있다. 업계에 따르면 ARM 기반 설계는 칩 출하량에 비례해 로열티가 부과되는데, 수천만 대가 팔리는 SSD 시장에서 이는 막대한 비용 부담이다. 특히 데이터센터용 SSD처럼 대량 납품이 이뤄지는 시장에서는 로열티 비용이 누적되며 수익성을 직접 압박하는 구조다.

반면 RISC-V는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오픈소스 표준이다. 삼성전자는 이번 전환을 통해 절감한 로열티를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에 재투입할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하게 됐다.

더 중요한 이유는 설계 자유도에 있다. ARM의 설계도가 수정이 어려운 기성복이라면, RISC-V는 필요한 기능을 마음대로 넣고 뺄 수 있는 맞춤복이다.

삼성전자는 BM9K1 설계 과정에서 메모리 제어와 오류 정정에 특화한 독자 기능을 직접 삽입해 성능 최적화를 도모하는 한편, 데이터센터 등 고객사가 요구하는 특수 기능에 맞춰 컨트롤러 구조를 유연하게 변경할 수 있다.

이미 웨스턴디지털(Western Digital)이 몇 년 전부터 RISC-V 기반 스워브(SweRV)’ 코어를 도입해 성과를 냈던 것처럼, 삼성전자 역시 메모리 최적화 컨트롤러를 통해 초격차 성능을 구현하겠다는 계산이다.

SSD부터인가? 리스크는 낮고 효용은 높은 전략적 테스트베드


반도체 업계에서는 삼성이 스마트폰용 AP엑시노스보다 SSD 컨트롤러에 RISC-V를 먼저 적용한 점에 주목한다. 여기에는 정교한 전략적 판단이 작용한다.
첫째, OS 호환성 제약 최소화다. 모바일 AP는 안드로이드 등 운영체제(OS)와의 복잡한 호환성이 필수지만, SSD 컨트롤러는 자체 펌웨어로 구동되므로 설계 변경에 따른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낮다.

둘째, 데이터 주권 확보다. AI 데이터센터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데이터를 저장하고 읽는 효율이 핵심 경쟁력이 됐다. 컨트롤러 설계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데이터 처리 경로를 삼성 입맛대로 최적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리스크도 존재한다. ARM은 단순한 CPU 설계를 넘어 컴파일러, 운영체제, 개발 툴까지 통합된 생태계를 제공하는 반면, RISC-V는 기업이 이를 상당 부분 자체 구축해야 한다는 부담이 따른다. 한 반도체 설계 전문가는 "RISC-VARM 대비 개발 생태계와 검증 툴이 아직 부족하다""특히 찰나의 오류도 허용되지 않는 SSD 특성상 데이터 무결성과 펌웨어 안정성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양산 성공의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엑시노스확산과 반도체 IP 지형도 재편… 주도권 전쟁 본격화


이번 행보는 삼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 전략 전반에 큰 변화를 예고한다. 현재 최신 엑시노스 2600 칩은 여전히 ARM의 최신 코어(ARMv9.3)를 사용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변화가 불가피하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단기적으로는 모바일 AP 내의 AI 가속기(NPU), 이미지처리장치(ISP), 보안 코어 등 보조 연산 블록부터 RISC-V로 대체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엔비디아(NVIDIA), 퀄컴(Qualcomm)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ARM의 독점력을 견제하기 위해 RISC-V 실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의 설계 독립선언… 메모리 거인, 아키텍처 기업으로 거듭날까


삼성전자가 단행한 이번 RISC-V(리스크-파이브) 전환은 단순한 부품 교체나 비용 절감 차원을 넘어선다. 이는 인공지능(AI) 시대의 핵심인 데이터 이동과 처리 구조를 삼성이 직접 설계하고 통제하겠다는 일종의 설계 주권선언이다. 반도체 경쟁의 축이 미세 공정 중심의 제조에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설계로 급격히 이동하는 가운데, 삼성전자가 메모리 제조사를 넘어 종합 아키텍처 기업으로 진화할 수 있을지에 글로벌 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이는 반도체 산업의 권력이 누가 칩을 만드느냐에서 누가 컴퓨팅의 규칙을 정의하느냐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한편, 향후 시장 참여자들과 투자자들이 주목해야 할 핵심 체크포인트는 세 가지다. 우선 차세대 SSD‘BM9K1’의 시장 안착 여부다. 오픈소스 기반인 RISC-V가 실제 양산 제품에서 ARM 수준의 안정성과 성능을 입증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특히 데이터 무결성이 생명인 기업용 저장장치 시장에서 합격점을 받는다면 삼성의 설계 신뢰도는 비약적으로 상승할 전망이다.

둘째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엑시노스RISC-V의 침투 속도다. 현재는 보조 연산 코어에 집중하고 있으나, 향후 메인 CPU 영역까지 독자 설계 비중을 높인다면 ARM에 지불하던 막대한 로열티를 수익으로 전환하는 분곡점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동반 성장이다. 우리 정부는 최근 ‘K-리스크파이브생태계 조성을 위한 범국가적 지원책을 내놓으며 힘을 보태고 있다. 삼성전자의 이번 행보를 기회 삼아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들이 독자적인 IP(설계 자산) 경쟁력을 확보하고, 특정 외산 기업에 의존해온 국내 반도체 산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지가 향후 한국 반도체의 명운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