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시집 '이소의 시간'에서 자연은 인간의 내면과 생의 조건을 비추는 핵심적인 시적 공간이다. '겨울, 자작나무 숲'의 눈물과 낙엽, 나무의 냄새는 생명과 소멸의 경계를 환기하며, 겨울의 강물과 갈대, 마른 나뭇가지 같은 이미지들은 기억과 부재의 감각을 구체적인 풍경으로 전환한다. 자연은 단순한 서정의 배경을 넘어 인간의 불완전성과 소멸의 필연성을 성찰하게 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시인은 ‘아픔 속으로 들어와 서성이는’ 울음의 손을 잡는다.
시집에서 이별은 관계의 종결로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과 의식 속에 지속적으로 되살아나는 경험이다. '이별 후, 더 깊어진 것'에 나타나는 미안함과 후회는 시간이 흘러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으며, '살며, 그리며, 바라보다'에서는 떠나간 존재의 흔적이 현재의 삶에 남아 감정의 파문을 일으킨다. 시인은 상실을 성급하게 치유하거나 극복의 서사로 봉합하지 않고, 해결되지 않은 기억이 인간의 내면을 형성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표제와 연결되는 '이소의 시간'에서 어미의 품을 떠나는 새끼 새의 비상은 홀로서기에 나서는 존재의 운명을 상징한다. 이는 성장의 비유를 넘어 익숙한 삶의 터전을 떠나 새로운 거처를 찾아야 하는 인간의 고독과 자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결단으로 확장된다. '날기 위해 운다'에서 생명의 순환을 알리는 봄의 기척과 한 치 앞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울음이 교차할 때, 비상은 추락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넘어야 하는 실존적 의지로 부각된다.
이미지 확대보기시조와 서예·회화의 결합은 언어예술의 표현 영역을 시각적 감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필획과 여백, 색채와 형태가 작품의 정서와 긴밀하게 호응할 때 시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를 넘어 새로운 감각적 울림을 형성한다. 이러한 융합이 장식적 효과에 머물지 않으려면 시의 주제와 시각적 이미지 사이에 의미적 필연성이 확보되어야 하며, 문자와 형상이 서로의 예술적 가능성을 심화하는 구성이 요구된다. ‘시인이 못다 그림’을 서(書)·화(畵)가 채운다.
'이소의 시간'은 상실과 회한의 시간을 통과하며 자신의 존재를 다시 읽어가는 한 시인의 내면적 기록이다. 이 시집의 성취는 고통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그리움을 손쉽게 극복하는 데 있지 않고, 해소되지 않는 기억과 부재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리는 데 있다. 고정선의 시조는 절제된 형식과 성찰적 시선을 통해 삶의 흔적을 되돌아보게 하며, 상실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의 가능성을 조용하지만, 깊은 여운으로 환기한다.
'이소의 시간'은 기억과 고독을 통과하며 자기 존재의 근원을 되묻는 시적 순례의 기록이다. 이 시집에서 회고는 지나간 시간을 복원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상실의 흔적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의 삶을 다시 구성하는 성찰의 과정으로 기능한다. 고정선의 시조가 도달하는 미학적 지점은 삶의 고통을 성급히 극복하는 데 있지 않으며, 끝내 남아 있는 그리움과 울음을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려는 조용한 의지에 있다.
시집은 서로 다른 정서와 상징을 시조의 압축적인 구조 안에 수용한다. '이별 후, 더 깊어진 것'이 감정의 복합성을 보여준고, '날기 위해 운다'는 고통을 수동적으로 감내하면서 미래를 향한 능동적 결단으로 시적 인식을 전환한다. 시인의 주제적 성취는 시조 고유의 형식미인 초·중·종장의 전개와 종장의 의미적 전환, 음보의 운용을 시구에 근거하며, 형식적 긴장을 확보하면서 드러난다. 고정선의 시집은 체험의 진정성 넘어 문학적 완성도를 획득한다. 시인은 지나간 시간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예순 수의 시알의 진실을 남겼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은 도끼에도 향을 묻힌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시인,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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